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선 정원디자이너 황지해(45)가 만든 원형정원이 전시되고 있다. 지난달 8일 시작된 원형정원 프로젝트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가 그것인데, “국내 미술관에서 정원을 전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예림 학예사)이다.
전시는 과천관 2층과 3층 사이 야외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지붕 역할을 하던 콘크리트 바닥의 원형 공간에 꽃과 나무, 풀을 심어 정원으로 조성했다. 정원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 원형정원도 한 달 만에 벌써 모습을 바꾸고 있다. 지난달에는 초록빛이 많고 화려했지만 어느새 낙엽이 지고 가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천관은 2023년 12월까지 2년간 전시를 이어가며 정원의 사계절을 보여줄 계획이다.
지난 4일 오후 원형정원에서 만난 황지해는 정원에 심은 한국 토종 식물들을 소개하느라 인터뷰는 뒷전이었다.
“이 정원에 심어진 식물이 200종이 넘는다. 그중 60∼70%가 토종이다. 꼬리진달래, 까마귀밥나무, 물철쭉, 노박덩굴…. 한반도 자생종이나 특산종이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식물들이 많다. 아, 이건 연지골무꽃인데 한택식물원에서 힘들게 구해왔다. 저기 큰바늘꽃도 꼭 써달라. 멸종위기종이라 식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우리 식물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종의 보존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토종 식물 이름이 쉼 없이 불려 나왔다.
“이게 가막살나무다. 까마귀가 먹는 열매라고 해서 가막살나무. 덜꿩나무는 들에 있는 꿩이 열매를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꽃이 댕강 매달려 있다고 해서 꽃댕강나무. 식물 이름이 너무 리듬감 있고 예쁘지 않나. 한글날엔 아이들과 함께 정원에 가서 우리 식물 이름을 읽어봐도 좋을 거 같다.”
황지해는 토종 식생 위주로 정원을 구현하는 걸로 유명하다. 들풀이나 들꽃, 덩굴도 많이 사용한다. 그는 “식물은 우리가 자라온 배경이고 기억이고 문화”라면서 “한국성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우리 자생종이나 특산종 한 주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첼시 때 내가 상을 받은 이유도 우리나라 식물들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개느삼이나 동자꽃, 삼지구엽초, 애기기린초… 이런 건 그들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광주를 기반으로 조형물, 벽화, 조경 등 환경미술 작업을 해오던 황지해는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주최하는 세계 최대 정원박람회인 ‘첼시 플라워쇼’에서 한국인 최초로 금상을 받으며 정원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첼시 플라워쇼 가든 부문에서 2011년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으로 금상과 최고상을 받았고, 2012년에도 ‘고요한 시간: DMZ 금지된 정원’으로 금상과 그해 신설된 회장상을 휩쓸었다.
황지해는 정원을 공부하러 런던에 갔다가 첼시 플라워쇼에 출품하느라 모든 유학 경비를 써버린 채 돌아왔다. 중요한 커리어를 얻었지만 국내 정원 사업에서 디자인의 가치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는다. 조경 공사비만 받고 예술정원을 만들어내는 게 지금까지 그의 일이었다.
그는 “정원은 공사가 아니라 미술작품”이라며 “제 자식과 같은 작품인데 예산이 적다고 팔을 하나 안 만들 수 없다. 가장 좋은 재질, 가장 좋은 퀄리티를 추구해야 되고. 그래서 일을 할 때마다 내 돈을 써야 했다”고 얘기했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를 했지만 이번 전시는 각별하다. 과천관은 원형정원 전시에 대해 “자연과 조화하는 예술 형식인 ‘정원’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밝혔다. 미술관이 정원을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황지해는 그동안 ‘정원예술’ ‘예술정원’ ‘정원디자이너’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는 “정원은 자연물을 하나의 물감으로, 조형물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는 예술”이라며 “자연이라는 재료는 한계가 없다. 신비스럽고, 새로운 세계를 깨닫게 해주고, 물감이나 다른 재료가 줄 수 없는 감정을 폭넓게 전해준다”고 말했다.
황지해의 정원은 자연주의를 추구한다. 야생성과 원시성이 살아있는 식물들을 선호하고 나무와 풀, 꽃 등이 함께 이루는 풍경과 관계를 중시한다. 비싸고 진귀한 식물들을 정교한 질서 속에서 화려하게 전시하는 서양의 인공정원과 다르다. 그는 “원시적 풍경을 굉장히 존중한다”면서 “무심함에 예술성과 영혼이 담겨 있다”고 얘기했다.
과천관 원형정원에는 곳곳에 덤불이 보인다. 팽나무, 찔레꽃, 노박덩굴, 으름덩굴 등이 서로 얽혀 있는 식이다. 원형정원이 원래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국 정원의 매력이나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자연성 그 자체라고 얘기하곤 한다. 무심하고 게으르고 버려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 무심하게 텃밭에서 걸어 나온 풀씨 하나, 박새가 흘린 씨앗 하나가 떨어져 만들어주는 풍경, 이보다 더 큰 매력이 어디 있겠나.”
과천관은 원형정원에 명상을 결합한 공간을 다음 달 선보인다. 원형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2원형전시실을 명상실로 바꾸는 공사를 하고 있다. 조용히 앉아서 바깥의 원형정원을 바라보며 ‘식물멍’ ‘정원멍’을 하는 공간인데, 미술관에선 이곳이 과천관을 대표하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때마침 한국에선 식물이 유행이다. 가드닝, 플랜테리어(식물을 주제로 한 인테리어), 반려식물 등에 대한 관심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점화돼 내년에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식물 트렌드에 대해 황지해는 “팬데믹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가 됐다”고 분석했다.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을 피해 다니다가 자연과 가까워져 버렸다. 녹색의 아름다움과 정원의 매력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 결핍은 더 커졌다. 녹색은 우리에게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준다. 자연을 대면하게 된 사람들이 그 매력에 빠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는 정원 만들기나 식물 키우기, 텃밭 가꾸기 등이 자신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은 옛날부터 텃밭을 가꿨다. 텃밭을 가꾸는 것이 그들의 문화생활이었고 이를 통해 경이로운 식물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줬다. 씨앗을 뿌리고 꽃과 나무를 심는 것은 가장 쉬운 창작 행위이자 문화 행위이다. 인간의 삶을 고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공공선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정원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주변 자연을 매개하는 역할을 해왔다. 옥상정원을 통해 과천관은 주변의 관악산 청계산과 연결됐다. 황지해는 “그동안 산을 잘라먹고 집과 건물을 지었다면 이제는 복원적인 개념으로 주변 산의 식생이 우리 주거공간이나 상업공간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며 “건물 옥상에 정원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지해는 2017년 서울역 고가를 보행로로 바꾼 서울로7017 개관 전시에서 ‘슈즈트리’를 선보였다가 거센 비판에 휩싸였다. 헌 신발을 이용한 거대 설치작품이 대중들의 눈에 흉물처럼 비친 것이다. 당시 충격으로 그는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과천관 원형정원은 지난 10여년간 영광과 상처를 두루 거쳐온 황지해 정원예술이 도착한 어떤 풍경을 보여준다.
과천=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