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토론의 기술

입력 2021-11-10 04:06

논증이 안 된 내용을 기정사실화해 전제로 삼는다.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지점을 찾는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목차들이다. 쇼펜하우어가 왜 이런 책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옳고 그름을 문제 삼지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오로지 토론과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적이다. 책에는 ‘위기에서 탈출하는 기술’로 이런 기술들이 소개되고 있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틀리다고 억지를 쓴다…. 그가 제시한 마지막 기술은 이것이다. 인신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인간의 소통이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필요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하다. 말을 통한 설득의 기술로서의 수사학이 그리스 시대부터 존중돼 온 것도 이해할 만하다. 수사학은 전달하는 기술이고 설득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전달과 설득이 상대방과의 대결을 전제할 때 이것은 싸움의 기술이 된다. 이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토론에서 내용은 질문되지 않고 테크닉만 부각된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방법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이 싸움의 기술들을 써먹으며 살기 때문일까.

정치의 계절에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토론을 접하면서 말 기술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모든 기술이 다 동원되는 현장을 보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전달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을 잘못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다. 어떤 사람은 언변이 좋아 자기에게 가해진 오해를 바로잡는 데 성공하지만 어떤 사람은 언변이 좋지 않아 새로운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자신의 잘못을 억지 논리로 뒤집기 하는 묘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소한 잘못도 해명하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도 있다.

토론을 말로 하는 결투라고 할 때 그 승부는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다. 기술을 잘 발휘해 상대를 제압하는 사람이 이기고 그 기술에 잘 대응하지 못한 사람이 진다. 그러나 토론은 검으로 하는 결투와 달라서 이기고 지고를 결정하는 것은 그 무대 위에 있는 토론자가 아니다. 토론자들은 토론에 참여한 상대가 아니라 토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승부는 토론 상대방의 설득이 아니라 토론을 지켜보는 이들의 설득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까 말 기술이 좋은 사람이 토론에서 상대를 제압하고도 승부에서 지는 일이 발생한다. 승부를 가르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 기술은 전달하는 내용의 진정성을 담보로 설득력을 획득한다. 말 기술은 그것이 기술로 인식되지 않을 때 설득력을 발휘한다. 내용은 없고, 혹은 다르고, 그저 기술만 있을 뿐이라고 인식되면 설득은 거두어진다. 그래서 화려한 기술로 상대를 제압해놓고도 승부에서 지는 일이 발생한다. 설득의 힘이 기술이 아니라 진실에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많고 언변이 좋은 것보다 떳떳한 것이 우선이다. 입장의 올바름이 현란한 기교에 앞선다.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하다. 길이 똑바르지 않으면 똑바로 걷기가 어렵다. 그래서 떳떳하지 않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우기고 유불리를 따라 말을 바꾸고 요령을 부리고 기술을 쓴다. 반대로 똑바른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똑바로 걷기 위해 별다른 기술을 구사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

기술을 익혀야 하지만 기술만 익혀서는 안 된다. 기술이 앞에 나오면 안 된다. 이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되는 공식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절실함이 기교를 만든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더 옳은 말은 이것이다. 진실함이 기교를 이긴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