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실험(思考實驗)은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진행하는 실험이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실험하는 방법이다. 실제 실험을 하기 전 준비단계에서 실시되기도 한다.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 등은 물리학 사고실험의 대표적인 예다. 인문학에선 공상과학(SF) 소설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 미래의 상황을 실험할 순 없기 때문이다.
SF 작가 김초엽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서 2055년의 지구는 자가증식하는 ‘더스트(먼지)’로 뒤덮인다. 대부분의 인간은 더스트에 의한 급성중독으로 죽고, 일부는 내성(耐性)을 얻어 살아남는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서로 약탈하고 살상용 로봇을 동원해 목숨을 빼앗는다. 단편 ‘마리의 춤’에선 한 세대에 걸쳐 시지각 이상증이 나타난다. 해양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 화학약품 탓이다.
김초엽의 소설 속에 나타난 사고실험 결과는 꽤나 설득력 있다. 인간의 미래를 잠시 엿보고 온 것처럼 생생하고, 그래서 섬뜩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맞닥뜨려 온 문제들, 인류가 상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우울한 미래 시나리오에 대해 다시금 톺아보게 한다. 최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김초엽은 “소설의 내용이 내가 상상하는 미래라고 말할 순 없지만, 과학적 디테일이라는 장치 때문에 독자들은 가까운 미래의 상황처럼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품들을 써내려가면서 환경이란 요소를 빼놓고 인간과 지구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털어놨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기업의 비재무적 가치를 일컫는다. 투자자들이 이 같은 요소를 반영해 기업 가치를 평가함으로써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ESG 경영은 재계의 주요 키워드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팬데믹은 의료뿐만 아니라 환경, 교육, 고용, 성평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가능성 위기를 생각하게 했다. 지금의 풍족한 삶을 위해 미래를 희생한 인간의 모습이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 등장할 때 콘텐츠 소비자들의 마음엔 경고음이 울린다. 그런 이유로 국내 콘텐츠 기업들의 ESG 경영 선언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에 우리 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시점에선 더욱 그렇다.
폐스크린과 같은 극장 자원을 새활용하고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객석나눔 프로그램 등을 실시해 온 CGV는 지난 4일 이사회에서 ESG위원회를 설치키로 했다. 롯데시네마는 학생 대상으로 영화와 관련된 교육 및 진로 탐색 기회를 제공하는 ‘영화 제작교실’을 운영한다. CJ ENM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유엔기구인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에 가입했다. 신인 창작자를 발굴·지원해 산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환경 콘퍼런스를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콘텐츠 업계의 ESG 경영이 중요한 건 무엇보다 파급력 때문이다. 문화는 사회적인 현상이고, 인간 생활 대부분의 범위에 영항을 미친다. 사회 문제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문제를 개선할 힘이 있다. 올봄 그래미 어워즈에선 인권운동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를 다룬 싱어송라이터 허(H.E.R.)의 곡이 ‘올해의 노래’에 선정됐다. 유엔총회에 참석한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전 세계 청년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독려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생존 경쟁과 불평등이 인간성 위기까지 불러온 현실을 까발렸다. 마블의 새 영화 ‘이터널스’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했다.
창작자들은 이론적 가능성에 근거해 우울한 미래에 대한 사고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콘텐츠 기업들은 이들을 지원하는 동시에 사고실험의 오류를 입증할 방법을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인류가 멸망한 세상엔 사랑받는 콘텐츠도, 지속가능한 기업도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