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 펑솨이가 폭로한 장가오리 전 국무원 상무부총리의 성폭행 의혹이 공산당 내부 권력 암투설로 번지고 있다. 이번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권력 핵심에 있던 인사를 겨냥했다는 점, 다음 주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연례 전체 회의를 앞두고 터졌다는 점에서 여러 정치적 해석을 낳고 있다. 장 전 부총리가 시 주석 반대파인 상하이방 출신이어서 현 지도부가 의도한 폭로일 수 있다는 추측도 제기된다.
펑솨이는 지난 2일 밤 중국 SNS인 웨이보 계정에 장 전 부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 따르면 펑솨이는 2011년쯤 톈진시 당서기였던 장 전 부총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듬해 장 전 부총리가 공산당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돼 베이징으로 떠나면서 둘 사이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2018년 퇴임한 장 전 부총리가 펑솨이를 집으로 초대해 또 다시 성폭행했고 당시 그의 아내 캉제가 망을 봤다는 것이다. 펑솨이는 “나는 그날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계속 울었다”고 강조했다.
이 글은 웨이보 계정에 올라온 지 20여분이 지나 삭제됐다. 현재 웨이보에서는 두 사람의 이름은 물론 테니스까지 검색 금지어로 설정됐다. 그러나 고발 글을 캡처한 파일이 해외 인터넷 사이트 등에 돌면서 논란은 일파만파 퍼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현지시간) “장 전 부총리와 같은 고위 지도자에 대한 공개적 비난은 전례 없는 일이지만 중국 공산당은 실각한 고위 관리들의 성적 비리를 폭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과거 상하이방 출신의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몰락할 때도 성적 스캔들이 먼저 터졌다”고 덧붙였다.
폭로가 터진 시점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 공산당은 오는 8~11일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를 열어 시 주석의 위상을 강화하는 역사 결의를 채택할 전망이다. 이는 내년 가을 20차 당대회에서 최종 확정될 시 주석의 3연임을 향한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현 지도부가 장 전 부총리를 본보기 삼아 반시진핑 세력에게 일종의 경고를 보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만리방화벽’으로 불리는 중국의 철저한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뚫고 공산당 고위급 인사의 실명이 들어간 글이 20여분간 방치된 건 당국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번 사태는 시 주석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장 전 부총리가 시 주석 집권 1기인 2012~2017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기 때문이다. 미국 CNN방송은 “중국 당국은 빠른 속도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며 “중국 지도부가 파장 확산을 우려한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