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희망 고문은 어떤 고문보다 잔인하다

입력 2021-11-05 04:08 수정 2021-11-05 04:08


다시나온정부집값 고점론
추이좀더지켜봐야 함에도
매번섣부른희망가 불러

비정규직, ‘소주성’ 대책은
실현가능성적음에도
희망 고문으로서민고통

정권진영논리가 야기한
‘열망과 환멸의사이클’
단절하는계기되어야

김부겸 국무총리가 지난 3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집값이 고점을 찍고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묘하게도 최근 10일 사이 정부 고위 인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집값 고점론’을 다시 꺼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부동산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서 “(집값이 떨어지리라는) 시장심리 변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음 날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은 “주택시장이 안정 국면으로 진입하는 초기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속으로 ‘이런 얘기 왜 안 나오나’ 했다. 어떤 대책이 나온 뒤 일시적 부동산 거래량 감소나 상승세 둔화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반복된 패턴이어서다. 지난달 은행의 대출 죄기가 본격화됐고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도 있었다. 시장에 관망세가 커지며 거래는 줄었다. 당연한 수순이건만 정부는 차분히 시장 추이를 분석하기보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느라 바쁘다.

이 정부가 모처럼 공급 위주 안을 선보였던 올 2·4 대책 후 홍 부총리는 “매매·전세가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며 시장이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올 상반기에만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1억원가량 올랐다. 지난해 7월 임대차법 개정안 통과 때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의원은 “8월 말·9월 초면 부동산시장 안정을 체감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임대차법으로) 부동산 효과가 곧 나오는데 30대의 영끌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영끌한 30대가 현명했다는 것은 이후 부동산 시장이 웅변해준다.

경제는 심리다. 경제가 어려울 때 국가의 잠재력과 비전을 제시하며 걱정 말라는 메시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심리 북돋우기는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현 정부가 서민을 위한다며 추진한 주요 경제정책 상당수가 희망 고문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뒤 첫 외부 일정으로 찾아간 인천공항공사에서 약속한 게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다. 모든 근로자가 정규직이 될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제로는 정치인의 단어라 해도 최소한 비정규직수가 줄어들거나 정규직 못잖은 대우를 받을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결말은 초라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8월 현재 비정규직은 처음 800만명을 돌파했고 정규직과의 월급차도 157만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정부는 코로나19 탓으로 돌렸다. 코로나 도래 전인 2019년 10월 비정규직이 748만명으로 당시 기준으로 1년 만에 사상 최대인 86만명이 급증한 건 그럼 뭔가. 정규직화의 아이콘 인천공항공사가 노노 갈등에 따른 일명 ‘인국공 사태’로 이제는 비정규직 정책 실패의 표본이 됐다. 웃픈 현실이다.

현 정부가 이전 정부들과의 차별화로 내세운 정책은 소득주도성장이고 핵심이 대폭적인 최저임금 인상이다. 대통령도 공약에서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을 내걸었다. 시작은 거창했다. 2018년 적용된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인상률이 16.4%였고, 2019년 최저임금은 8350원으로 역시 두 자릿수인 10.9% 뛰었다. 그 후 고용 상황이 악화되고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정부는 액셀에서 브레이크로 급히 갈아탔다. 최종적으로 현 정부 임기 중 연평균 인상률은 7.2%. 적폐라던 박근혜정부 평균치(7.4%)에도 못 미친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권의 최저임금 인상 ‘희망 고문’이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기만으로 마무리됐다”고 비판했다.

현 정부의 희망 고문은 일시적 실수로 생긴 게 아니어서 악성에 가깝다. 이들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특유의 진영 논리와 이념적 고집으로 강행하고 서민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 넣었다. 상흔은 고스란히 서민 몫이 됐다. “그때 내 말대로 집을 샀어야 했다”며 언쟁을 벌이는 부부들을 지금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정부를 믿은 무주택자는 벼락거지로, 비정규직은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속출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진보 정권 아래서 약자에 대한 희망 고문이 빈번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진보는 입으로는 낙오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지만 행동은 보수와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희망 고문’을 함으로써 ‘열망과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한다”(바벨탑 공화국)고 지적했다. 희망 고문은 어떤 고문보다 잔인하다. 임기가 반 년 남짓 남은 현 정부가 남긴 교훈으로 받아들이기엔 가슴이 쓰리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