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판사의 판결문 너머 이야기

입력 2021-11-04 18:02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연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드러난 사실만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유죄와 무죄는 법정에서 가려지고 뉴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판결문 너머의 이야기는 법정 밖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현직 판사 박주영이 쓴 ‘법정의 얼굴들’은 그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다.

2019년 저자는 자살방조미수 사건을 맡는다. 29세 김영배(가명)와 35살 박찬우(가명) 등 3명의 젊은 남성이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두려움을 느낀 박씨가 자살 시도를 멈추고 119에 신고했다. 김씨와 박씨는 기소됐고, 나머지 한 명은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다가 도주했다. 김씨는 주범으로 구속됐다.

김씨는 부모가 이혼해 아버지, 여동생, 할머니와 살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땐 공부도 곧잘 했고 친구들과 관계도 좋았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성적은 떨어졌다.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 자주 가출했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공고에 진학했지만 “고등학교는 나와서 뭐하냐”는 아버지의 말에 상처받아 1학년 때 자퇴했다. 집을 나와 찜질방 종업원, 현장 일용직 등의 일을 했다. 어머니의 사망으로 상심한 김씨는 우울증을 앓았다.

김씨와 박씨는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생계를 이어갈 돈이 없었고, 돈을 구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가족에게 상처받고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김씨에겐 징역 10개월, 박씨에겐 징역 8개월에 각각 2년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법정에선 다음과 같은 판결문이 낭독됐다.

“생활고로, 우울증으로, 세상에서 고립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결코 잘살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책에는 저자가 목격한 여러 얼굴들이 등장한다. 부모에게 맞아 목숨을 잃은 아이, 먹고살 돈이 없어 교도소라도 가기 위해 방화를 저지른 노인…. 재판은 사건을 막을 수 없다. 사법절차는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불의한 세상에서 희생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기록하고 알리는 일이 먼저라고 저자는 말한다.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한 저자는 부산고법에 근무하고 있다. 10여년간 부산지법 울산지법 대전지법 등에서 주로 형사재판을 맡았다. 2019년 펴낸 첫 번째 에세이 ‘어떤 양형 이유’로 주목받았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