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요구한 반도체 정보 제공 시한이 8일로 다가오면서 우리 기업들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다. 정보를 요구하는 미국과 최대 고객 가운데 하나인 중국 모두 불만을 갖지 않을 해법을 찾는 데 고심하고 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이 요구한 반도체 정보를 제공할지 여부와 제공 정보의 수위 등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회사는 기업의 비밀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관련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TSMC가 당초 입장을 번복하고 미국에 자료를 제출하기로 한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26일 ‘한국전자전 2021’ 행사장에서 반도체 정보 요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 차분히 잘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정보 제출을 꺼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미국이 요구한 정보에는 판매 및 재고 정보까지 모두 포함돼 있다. 이는 공시에도 포함하지 않는 기밀이다. 외부에 유출되면, 가격 협상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메모리반도체의 주요 고객이 미국 빅테크 기업이라는 걸 고려하면, 미국 정부에 제공한 기밀 정보가 이들에게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다 중국 눈치도 봐야 해 고민이 깊다. 중국은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의 행동들이 결국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체들이 어디에, 얼마나 반도체를 팔았는지를 담은 정보가 노출되면 결국 중국 업체에 반도체를 팔지 말라는 압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 매출 26조6924억원을 기록했다. 미국을 포함한 미주 지역(25조1727억원)을 제친 숫자다. 삼성전자가 중국에서 거둔 매출의 대부분은 반도체다. SK하이닉스도 매출의 절반 가량을 중국에서 올리고 있다.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많을 때엔 미국 매출이, 모바일 신제품 출시가 많을 때는 중국 매출이 늘어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요구하는 데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건 어렵다”면서도 “미국과 중국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쪽을 모두 고객으로 두고 있는 우리 기업이 한쪽의 편을 드는 모양새를 만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 차원의 지원사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기업들이 자료 제출을 마치는 대로 미국 상무부와 반도체 공급망 관련 협력을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이달 중으로 미국을 방문해 지나 러만도 상무부 장관과 회담을 갖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최근 반도체 분야에서 정례적으로 협력을 논의할 ‘국장급 반도체 대화채널’을 신설하는 데 합의했고, 기존 국장급 ‘한·미 산업협력 대화’도 체급을 격상해 운영하기로 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