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많지 않은 시골의 작은 고등학교에서도 고교학점제(이하 학점제) 도입이 가능할까. 교사와 학생이 충분해 다양한 수업을 개설할 수 있는 대도시 학교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수업 선택권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학점제는 고교생이 대학생처럼 진로·적성에 맞는 수업을 골라 듣고 누적된 학점으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활용하는 제도다. 동등한 수업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도입하기 어렵고 도입해서도 안 된다.
동물을 좋아해 수의사가 되고 싶은 고교생 두 명을 예로 들어보자. 한 학생은 대도시의 큰 학교, 다른 학생은 시골의 작은 학교를 다닌다. 대도시 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에는 생명공학을 비롯해 수의학과 진학에 유리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학생이 다양한 수업에서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여러 교사들이 상세히 기록했다. 시골 고교에는 정식 생물 교사조차 없다. 생물 교과의 경우 기초 과목 말고는 변변한 수강 기록이 없다.
두 학생의 학생부가 동시에 대학의 평가 테이블로 올라가면 결과는 자명하다. 도시와 농산어촌의 교육 격차를 극복할 방안을 찾지 못한 채 학점제를 도입하면 ‘동등한 교육 기회 보장’이란 가치는 크게 훼손된다. 2025년 3월 학점제 전면 도입을 예고한 교육부도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소규모 고교를 대상으로 학점제 연구학교를 운영하며 해법을 찾고 있다. 소규모 학점제 연구학교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전교생 41명인 강원도 영월군 마차고등학교를 지난달 27일 취재했다.
시골 수험생들의 모의면접날
임상병리학과에 지원한 3학년 김지현양은 코앞으로 다가온 대학 면접고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상 질문을 뽑고 답변할 내용을 사흘에 걸쳐 통째로 외웠다고 했다. 김양의 절박함은 이날 학교에서 있었던 모의면접에서 잘 드러났다.
김양은 ‘학생부를 보면 봉사활동에 복지사 관련 내용이 많은데 임상병리학과 지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란 다소 까다로운 질문에 “고교 입학 때는 원하는 진로가 없었는데 봉사활동하며 만난 아이들이 있어 의료 분야로 진로를 잡은 뒤에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의료 분야 봉사활동은 아니었지만 애들이 다치면 평소 연마한 응급처치로 도움을 줄 수 있어 좋았습니다”고 답했다. 김양은 이어지는 ‘고교 재학 중 저희 학과와 관련해 읽은 책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등의 질문에 1초도 걸리지 않고 대답했다.
대학 면접관 역할을 맡은 이영철 인제고 교사는 막힘 없는 빠른 답변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 교사는 강원도진로교사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진로·진학분야 전문 교사다. 마차고 학생을 위해 차로 2시간 30분을 운전해 왔다. 그는 김양이 실제 면접과 똑같이 인사한 뒤 면접장을 나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 다시 불러 앉히고는 “지난번보다 눈빛도 좋고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다. 다만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이 너무 빨리 나오는데 약간 여유를 갖고 답하고 목소리를 좀 더 크게 하면 흠잡을 데가 거의 없다”고 말해줬다.
“혼자 준비하는 것보다 말을 주고받으니까 정리가 됐고 선생님 지적 사항도 도움이 됐어요. 특히 바로바로 답변하는 건 말하면서 저도 느꼈는데 연습해 고쳐야겠어요.” 김양이 웃으며 말했다. 이날 모의면접에는 김양을 포함해 아동복지학부에 지원한 학생, 신학과에 지원한 학생까지 모두 3명이 참여했다. 이 교사는 모르는 질문이 나왔을 때 대처하는 방법부터 학생의 말투와 표정까지 세세하게 코칭한 뒤 학교를 떠났다. 전문적인 면접 코칭을 받기 어려운 김양 등에게는 귀중한 기회의 시간이었다.
“수능으로는 어렵다”
마차고는 비교적 양호한 대입 실적을 보이는 학교다. 열 명 남짓한 졸업생 중에 매년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생을 배출하고 있다. 학생의 진로 희망에 따른 맞춤형 진학도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사교육 도움 없이 공교육의 힘만으로 이룬 성과다. 다만 수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교사들의 공통된 얘기다. 채희수 교사는 “수능 성적으로는 도시의 아이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학생부 위주 전형이 아니면 저희 같은 농산어촌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한 명도 진학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농산어촌의 소규모 학교에서 수능 점수로 경쟁하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 일단 수학 등 위계가 있는 과목은 한번 뒤처지면 사교육 도움 없이 따라잡기 어렵다. 무엇보다 상위권 변별력을 위한 초고난도 문항에서 대도시 아이들을 상대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초고난도 문항은 교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수준이다. 사교육특구에선 이런 초고난도 문항만을 집중 훈련하는 학원도 존재한다. 어려서 기초학력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농산어촌 지역에선 넘을 수 없는 벽이나 마찬가지다. 채 교사에 따르면 올해 고3 10명 모두 수능 성적이 필요 없는 전형에 원서를 넣었다.
학교 교육과정을 풍성하게 구성하고 그걸 재료로 학생부를 충실하게 기록해 학생부 위주 전형을 노릴 수밖에 없다. 면접 준비도 이런 학생부 위주 전형을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다. 학생들의 수업 선택권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인근의 주천고와 금요일마다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 대학·지역사회와 연계한 교과목을 개설해 운영하고, 온라인공동교육과정도 시도하고 있다.
작은 학교만의 장점도 있다. 학생과 교사 비율이 4대 1이어서 담임교사와 진로진학 담당 교사 혹은 진학 관련해 경험이 많은 교사 등이 ‘원 팀’으로 지도할 수 있다. 이영철 교사는 “농산어촌 아이들에게는 도시 아이들과의 경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결국 자신감이 가장 중요한데 교육 인프라가 많은 도시보다 더 두터운 지원이 가능해야 이곳 아이들이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교육개발원·국민일보 공동기획>
영월=글·사진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미래교육 대전환 프로젝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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