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는 주전 8세기경 남유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당시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없으나 여호와의 영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충만한 것 세 가지를 밝히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정의이다.(8절) 정의는 올바른 도리를 뜻하는데 이는 거룩한 삶의 밑바탕이 된다.
미가는 타락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땅의 운명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9~12절) 그들은 시온을 억울한 피로 세웠고, 예루살렘을 더러운 죄악으로 건축했다. 그리고 그들의 타락은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시온은 갈아엎은 밭처럼 되고, 예루살렘은 무너져 무더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성전은 아무도 찾지 않아 수풀만 무성한 폐허가 될 운명이다.
이런 결말을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원했겠는가. 자신들의 근간이 되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잃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았어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없으니 멸망할 수밖에 없다.
표면적으로 정의를 외치지 않는 지도자는 없다. 그러나 그 정의는 상대적이다. 올바르다는 것도 거룩하다는 것도 상대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 판단, 내 기준으로 올바르다면 그것이 정의다. 그러니 이런 상대적 정의를 기초로 한 나라가 영원할 수 없다. 또 다른 상대적 정의를 외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 나타나 이전에 있던 것을 무너뜨린다. 이 같은 반복은 이 땅의 상대적 정의의 숙명이다.
미가서 3장의 말씀을 보면 당시 지도자들은 이런 상대적 정의에 자신의 터전을 세웠다. 정치 지도자들은 “힘을 강력하게 사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자기 의를 내세웠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리 대신 귀에 듣기에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의를 자신의 기준으로 세웠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야훼의 이름을 외치고 있으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정의에서 벗어난 이들의 무너짐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로 충만해질 수 있나. 사람이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주장하는 정의를 내려놓고 참된 정의, 절대 정의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내 보좌에서 내려와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순복해야 한다. 그렇게 내 삶이 내가 다스리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절대 정의가 나의 안에 충만하게 된다.
귀가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종종 귀가 어두운 어르신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 마치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서로 안 들리니 큰 목소리로 자기주장만 되풀이한다. 나만 옳다를 외치고 내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어떻게 해야 조용해질 수 있나. 보청기를 사용해서 들으면 된다. 그러면 목소리는 줄어들고 듣는 가운데 대화가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다. 내 고집, 내 방법, 내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조용히 들어야 한다. 상대적인 내 정의가 아닌 절대적인 정의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상대적인 주장과 판단으로 생겨난 혼란들을 내려놓으며 잠잠히 듣고자 할 때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그의 정의에 서 있는 교회는 절대 영광을 빼앗기지 않는다. 겸손히 하나님이 통치자, 절대 의임을 인정하는 나라는 멸망 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도, 교회, 나라는 정의 위에 서서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강력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미가에게 충만했던, 그리고 우리에게 충만해야 할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 기억하며 그것을 굳게 붙들라. 그럴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윤창재 미국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