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서울 중구 한 허름한 사무실. 좁은 공간 한쪽에 자리 잡은 직장갑질119 활동가 3명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간밤에 이메일로 접수된 갑질 제보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최근 3주간 들어온 제보”라며 기자에게 세 권의 서류철을 건넸다. 각각 30여쪽 분량으로 시청 경비원, 콜센터 상담사, 대학 건설관리팀원 등이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일목요연하게 피해 상황을 정리한 것부터 “너무 힘들어 메일 보낸다”는 짧은 글도 있었다. 저마다 사연은 달랐지만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람들이 발신한 구조 요청 신호였다.
11월 1일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이슈를 한국 사회에 던진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가 출범 4년을 맞는 날이다. 지난 4년간 온라인으로 접수된 신고는 1만5947건이나 된다. 중소기업·비정규직처럼 상대적으로 더 기댈 곳이 없는 직장인의 호소가 가장 많다. 변호사, 노무사, 노동전문가로 구성된 150여명의 활동가들이 1시간30분씩 법률·노무 상담을 한다. 기자가 찾은 날도 김중희 거제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 사무국장이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톡(메시지)을 남겨주세요”라는 글을 올리자마자 익명 단체대화방에는 10여명의 피해자가 ‘직괴’(직장 내 괴롭힘) 호소를 쏟아냈다. ‘직괴’는 대화방에서 통용되는 줄임말이다.
한 직장인이 “연차 사용을 막는 사장을 처벌받게 하고 싶다”고 하자 김 국장은 “근로감독관에게 강력히 주장하면 과태료 처분은 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냈다. 또 다른 직장인이 “폭행 가해자가 곧 퇴사하는데 사무실 옆 건물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한대요”라고 걱정할 땐 “불안하고 힘들다고 사실대로 말하세요. 정신과 진료도 받으시고요”라는 위로가 건네졌다. 상담이 없는 시간에도 대화방은 활발하다. 피해자들끼리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한다. 심각한 갑질은 이메일로 추가 제보를 받은 뒤 고용노동청 고발 등 ‘액션’으로 이어진다.
제보가 끝없이 이어진 4년간 괴롭힘 양상도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폭행·폭언이 줄어든 대신 ‘은따’(은근한 따돌림)가 빠르게 급증하고 있다는 게 직장갑질119 측의 설명이다. 괴롭힘이 더 교묘하고, 은밀해진 셈이다. 박점규 운영위원은 “요즘은 한 사람만 빼놓고 이야기한다거나 ‘찍힌’ 사람한테 다른 이들이 모두 꺼려하는 일을 주는 식의 괴롭힘이 일어난다”며 “이런 경우는 증거를 남기기 어렵기 때문에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갑질은 계속되지만 그래도 상황이 조금이나마 개선된 사례들도 있다. ‘한림대 성심병원 간호사 장기자랑’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 간호사가 “체육대회 때마다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추게 한다”며 제보한 게 계기였다. 박 운영위원은 “단체가 만들어진 지 하루 만에 첫 제보를 받고, 대화방에 하나둘 모인 전현직 간호사들이 407건의 폭로를 쏟아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직장갑질119는 미용사나 간호조무사처럼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직장인을 대상으로 ‘업종별 온라인노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 위원장은 “일터가 조금씩 나아질 때마다 뿌듯하다”며 “5인 미만 사업장 같은 직장 갑질의 상대적 사각지대에 대한 감시가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