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그룹이 앞다퉈 강조해온 디지털 플랫폼 혁신이 금융당국의 한마디에 ‘창구대출’로 퇴보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을 조이라고 금융권을 압박하자 시중은행들은 비대면상품을 축소하는 등 고객을 ‘불편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출 수요자 편의보다는 대출 총량 규제를 우선하는 금융당국의 태도와, 당국 눈치를 살피는 은행들의 행태에 피해는 고스란히 금융 소비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28일 은행권에 따르면 이달 말부터 케이뱅크를 제외한 모든 시중은행에서 1주택 보유자의 비대면 전세대출 신청이 불가능해진다. 비대면 전세대출뿐 아니라 비대면 신용대출 일부 혜택은 이미 사라졌다. 신한은행은 최근 12개 비대면 신용대출에 중도 상환 수수료를 부과키로 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7월 비대면 신용대출 상품 일부에 중도상환 수수료를 내도록 했다.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억누르기 기조로 급선회한 데 보조를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은행 점포 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급등한 전셋값을 충당해야 하는 서민층 등 대출 실수요자들이 대출받기가 더 불편해졌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 점포는 2015년 5096곳에서 2020년 4646곳으로 감소하는 등 지점 통폐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데는 우선 금융 당국의 이율배반적인 정책 스탠스가 문제로 지적된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이날 은행연합회에서 취임 후 첫 주요 시중은행장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은행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변화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하나의 ‘수퍼 앱’을 통해 은행·증권·보험 등 다양한 서비스를 고객의 니즈에 맞춰 제공하는 ‘디지털 유니버설 뱅크’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여건을 조성해 나갈 생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금융위원장 발언과 달리 현실은 비대면 대출 불허 같은 ‘거꾸로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출 수요자들보다는 당국 눈치만 보는 시중은행들도 할 말은 없다. 5대 금융지주 회장들은 올 들어 일제히 디지털 플랫폼 강화를 경영 키워드로 꼽으며 관련 사업을 적극 추진해왔다. 금융그룹들은 앞다퉈 ‘최고의 금융 플랫폼 구축’ ‘생활금융 플랫폼’ ‘금융사 제1의 고객 접점은 디지털 플랫폼’ 등 구호를 내세웠다. 빅테크 서비스와 결합한 인터넷은행과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 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상품 개발이 불가피해진 결과다.
하지만 수익성을 높이려고 디지털 플랫폼 강화를 외쳤다가 가계대출 조이기에 나선 당국의 정책 변화에 고객 편의를 포기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사실 대출 심사를 창구에서 하든, 비대면으로 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대출 실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대출 접근성까지 급격하게 악화된 모양새”라며 “시중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깐깐하게 하도록 디지털 플랫폼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데도 금융소비자들만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