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대학교대학원 치유선교학과가 다음 달 석박사과정 학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학과장 김찬기(대전방주교회) 목사와 통화해 간단히 일정만 듣고자 했다. 하지만 전화로 그의 간증을 듣고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치유선교학과 발전은 이후 주어진 절박한 사명이었다.
김 목사는 담도암을 앓았다. 처음에는 황달이 왔고, 초음파 검사 결과를 본 의사가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가져간 검사 결과를 보고 담도암이라고 했다. 조직 검사는 안 해보냐고 했다. 의사는 암일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말했다. 믿기지 않았고 김 목사는 “내가 목사인데,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고 싶다”며 “한 달간 기도해보고 그래도 암이 그대로이면 수술하겠다”고 했다. 의사는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며 “그래도 원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당시 100억대 새 성전을 짓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것이 원인이었던 같아요. 지하 공사를 마친 상태에서 재정이 없어 멈춰있었어요. 기존 성전과 교회 수양관을 팔려고 내놓았지만 연락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대전 교회에 알리자 상황은 더 어수선해졌다. ‘치유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암이라니…’하는 눈치였다. 그런 반응에 소화는 안 되고 잠도 오지 않았다. 한 달이 금세 지났고 암 덩어리는 커져 있었다. 의사는 “그때 내가 안 된다고 말릴걸”이라고 자책하면서 “그래도 일단 열어보자”고 했다. 김 목사는 담도는 물론 십이지장, 췌장까지 잘라냈다.
수술 자체는 잘됐다. 그 정도만 해도 살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출혈이 생겼다. 다시 배를 열었다. 수술하고 보름 만에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세 번째 수술을 해야 했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고 김 목사는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김 목사도 마음이 흔들렸다. 수술대에 누웠는데 천정에 성경 구절이 붙어 있었다고 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 41:10)
수술 중에도 출혈은 계속됐다. 문제는 피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뱃속에 거즈를 넣어 놓고 배를 닫았다. 살 가망이 없었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죽는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렇게 3일째. 기적이 일어났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던 출혈이 멈췄다. 뱃속에 고인 피를 빼내는 수술을 끝으로 회복 속도가 빨랐다. 의사가 어리둥절하며 25년간 일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내가 누워있는 중에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중보했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의식이 또렷해졌을 때 정말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인지 알겠더라고요. 말은 못 하고 눈물만 흘렸어요. 산소호흡기를 떼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족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천사 같더라고요. 말하다가도 울고 전화하다가도 울고 왜 우느냐고 물으면 살아있는 게 감사해서 운다고 했어요.”
김 목사는 그때 전인치유가 무엇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인치유는 육체와 마음과 영의 회복으로 단순히 육체의 병을 치료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며 “마음과 영의 회복까지 나아가야 한다. 당시 영의 회복까지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며 우리가 사는 환경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이런 역경을 딛고 올 초 치유선교학과 학과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2004년 개설된 치유선교학과 1기생으로, 2007년 학과장을 맡았었다. 그는 이번에 다시 학과를 맡으면서 치유 선교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면서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치유선교학을 함께 공부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장학금도 많이 줘요.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기 오는 분들은 예수를 닮아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산, 진주, 파주 등 전국에서 학생들이 옵니다. 4시간씩 운전해 오는 학생도 있어요. 그만큼 은혜가 됩니다. 다음 달 모집하는 석박사과정에 많은 관심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대전=글·사진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