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아픔을 나눈다는 것

입력 2021-10-25 04:05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는 데 열중하는 사람보다 유쾌하게든 심각하게든 약함을 편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꺼내놓는 말에 과시만 가득한 사람은 드러내기 싫은 아픔이 깊어 벽을 단단히 치고 있다는 인상이다. 얼마 전 만난 사람이 그랬다. 허울 좋은 명함을 들고 자기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 과시하느라 두어 시간을 혼자 떠들고 있는 그녀를 보며 저 안에 있는 상처는 도대체 얼마큼의 크기일까 궁금했다. 우연히 자신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을 때 그녀는 바로 숨어버리는 선택을 했고 그 후로 다시 보지 못했다. 아무에게나 쉽게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보다.

아픔을 터놓는 대화를 좋아하고 어려움에 귀 기울여서인지 주위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동안 고민했던 다양한 상념들이 이들과 공감하기 위해 품었던 일들이었을까 생각될 만큼 불행에 대한 공감에 내 소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이런 감각에 문제가 생겼다. 징징대는 소리가 듣기 싫고 하소연이 시작될 것 같으면 자리를 피하고 싶다. 오래 이어진 코로나19 상황으로 피로감이 누적된 걸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나의 공감력이 힘을 발휘해줘야 할 텐데 이 같은 변화가 좋지 않은 신호라는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며칠 전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통증을 어느 때보다 세게 겪으며 아찔했다. 별일 아니었지만 하룻밤 꼬박 이어졌던 통증에 시달리면서 요즘 외면하던 다른 이들의 고통이 다시 생생히 와닿았다. 사연은 제각각이고 고통의 크기도 다 다르겠지만 각자가 느끼기에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이만큼 아프겠구나 생각했다. 잊고 싶기 때문인지 아니면 모르는 게 편하다는 이기심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요즘의 심보가 내 생활에 극심한 통증이 없어 감각이 무뎌진 탓이었나 보다. 머리로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통증의 깊이를 몸은 잊고 있었던 거다. 보기 싫고 듣기 싫던 가까운 이들의 위기 장면들을 다시 마주해야겠다.

윤소정 패션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