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만건 넘는 파일 유출로 압둘라 요르단 국왕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부로 의심되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엘리트들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하지만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워런 버핏 같은 미국 최고 부자들은 (문건에) 없었다.”(영국 데일리메일)
“탈세로 축적하고 금융피난처로 세탁한 부유층의 부당 이익은 잘 드러났다. 하지만 뭔가 수상해 보인다. 미국인은 어디에 있나.”(아랍권 위성TV방송 알마야딘)
전 세계 주요 인사의 자금세탁과 부정축재 정황을 고발한 사상 최대 폭로 문건 ‘판도라 페이퍼’에 왜 미국 거물의 이름은 없었을까. 각국 정상을 비롯해 정치인과 공무원 수백명을 지목한 이 문건이 여러 나라를 흔드는 동안 미국은 사실상 무풍지대인 양 고요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자 최대 경제국이다. 올해 기준 세계 100대 부자 중 약 40명, 전 세계 억만장자 4명 중 1명 이상(약 26%)이 미국인이다. 이를 생각하면 돈의 흐름에 관한 저 방대한 문서에 이렇다 할 미국인의 이름이 눈에 띄지 않은 점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정작 미국은 다른 나라 정치인들의 핵심 조세회피처 노릇을 해온 사실이 판도라 페이퍼에서 새롭게 부각됐다.
가설은 크게 세 가지다. ①미국 부자들은 다른 조세회피처에 돈을 숨겼다. ②그들은 이미 세제 혜택을 많이 받아 꼼수를 쓸 필요가 없다. ③미국이 자국 부자들을 보호하고 있다.
세 번째 가설부터 보자. 알마야딘은 ‘판도라 페이퍼: 왜 미국인은 없나’라는 제목의 영문 기사에서 “폭발성 강한 국제적 탐사보도는 미국이 현재 세계적으로 해외 조세회피처 노릇을 하고 있지만 미국 거물들의 이름은 숨기고 있음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아마존 애플 페이스북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넷플릭스 등 이른바 ‘실리콘 식스(실리콘밸리 6대 기업)’가 내야 할 세금과 실제 내는 세금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영국 비영리단체 페어택스마크의 2019년 보고서 내용을 인용했다.
알마야딘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0~2019년 사이 기업들은 합법적 조세 회피 전략을 사용해 세계 모든 지역에 걸쳐 1553억 달러의 세금을 덜 냈다”며 “지불된 현금뿐만 아니라 나중의 세금을 내기 위해 적립된 돈도 그 격차는 1002억 달러였다”고 설명했다.
방송은 이 정도 거액과 관련 거물급 인사들이 문건에 등장하지 않은 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배후설에 힘을 실었다. 알마야딘은 “판도라 페이퍼 뒤에 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를 파고들면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의 파생기관인 포드재단 등이 공개적으로 돈을 대는 단체라는 걸 깨닫게 된다”며 “ICIJ는 아마존 협력 프로그램의 참여자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알마야딘은 아마존 창업자 베이조스가 판도라 페이퍼 보도에 참여한 워싱턴포스트의 소유주라는 점도 언급했다. 보도 과정에 미 정부나 기업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참고로 알마야딘은 레바논 이란 등 미국과 대립 중인 이슬람 시아파 국가에 기반을 둔 매체다.
미국이 자국 부자들의 조세회피를 숨겨줬는지는 몰라도 세금을 통 크게 깎아줘 온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아마존은 110억 달러(13조500억원) 넘는 세전 영업이익을 낸 2018년까지 2년 연속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게다가 연방 정부는 아마존에 세금 환급으로 2017년 1억3700만 달러(1625억5000만원), 2018년 1억2900만 달러(1530억6000만원)를 돌려줬다.
2019년 2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자신의 트워터에 “만약 당신이 아마존 프라임 회원이 되려고 연회비 119달러를 냈다면 아마존이 세금으로 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세금 혜택은 공화당의 감세 정책, 수익을 내지 못한 해의 이월손실 반영, 연구개발(R&D) 및 주식 기반 직원 보상에 대한 세금 공제 등이 맞물려 가능했다. 지난해 아마존이 2016년 이후 처음으로 낸 연방소득세는 1억6200만 달러로 2019년도 세전 이익 139억 달러의 1.2%에 불과했다.
지난 6월 미국 탐사보도전문매체 프로퍼블리카는 미 국세청 자료를 근거로 부자들이 합법적으로 연방소득세를 회피해왔다고 보도했다. 명단에는 베이조스를 비롯해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 등이 올랐다.
미국 상위 부자 25명은 2014~2018년 자산이 4010억 달러(약 477조원) 늘어나는 동안 연방소득세로 3.4%인 136억 달러(약 16조1400억원)를 내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중위소득가구가 1년에 7만 달러(약8300만원) 벌어 14%를 연방소득세로 낸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세율이다.
이렇게 미국 부자들이 지금도 충분히 세금을 적게 내니 해외 조세피난처에 돈을 숨길 유인이 적다는 게 두 번째 가설이다. 전문가들은 미 공영라디오방송 NPR에 “(판도라 페이퍼 보도는) 미국의 낮은 세율 덕에 일부 미국인이 해외에 돈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 자산가들이 눈에 띄지 않는 지역의 역외 계좌를 활용해 돈을 은폐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데일리메일은 “판도라 페이퍼는 스위스, 싱가포르, 키프로스, 벨리즈,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서 운영되는 14개 금융서비스 기관에 대한 기록만 포함한다”며 “다른 기관이 미국인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