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복제약 출시 이후 독점적 지위를 상실한 제약사에 가격을 내리라는 행정처분을 내렸음에도 제약사들이 소송을 통해 가격 인하를 지연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발생한 건강보험 손실 규모는 2018년 이후 4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10일 보건복지부와 제약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6월 23일 제약사 한국아스텔라스의 과민성 방광 치료제인 ‘베타미가’의 약값을 같은 해 7월부터 인하하기로 했다. 복제약(제네릭)이 등재되면서 약가 인하를 직권으로 단행한 것이다. 하지만 제약사가 곧바로 취소소송을 냈고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가격은 1년째 그대로다.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 약제의 효용성 등을 다투는 본안 소송 판결까지 정부는 약값을 내릴 수 없다. 가격 인하 시점이 늦춰지면서 건강보험 손실액은 불어난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7월 베타미가의 약가 인하 집행정지가 이뤄진 이후 지난 8월까지 발생한 건보 손실액은 174억원에 달한다.
LG화학의 골관절염 치료제 ‘시노비안주’는 2019년 11월 약가 인하가 이뤄질 예정이었지만 제약사가 곧바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약값이 동결됐다. 2019년 12월 인하 결정이 난 SK케미칼의 위궤양 치료제 ‘프로맥정’도 비슷한 경우다. 두 제약사의 행정 소송으로 인한 건보 손실 규모는 각각 117억원, 60억원이었다.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8년 이후 제약사가 제기한 집행정지가 인용돼 발생한 건보 손실은 4000억원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제약사들은 본안 소송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인하 시점을 늦추기 위해 소송을 남용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비슷한 내용의 본안 소송은 이제까지 복지부가 모두 승소했다. 2017년 이후 진행된 소송 29건 중 대법원 판결이 났거나 제약사 측이 항소하지 않아 재판이 마무리된 7건 모두 복지부가 최종 승소했다. 1·2심이 진행 중인 5건도 전부 복지부가 이겼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난달 말까지 복지부가 패소한 사례는 1건도 없었다”며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복지부가 최종 승소해도 건보 재정 손실을 회복할 수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국회에서는 지난달 29일 본안 소송에서 정부가 승소한 경우 약가 인하 처분 확정 시점부터 승소 시점까지 초과 금액을 환수하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은 “건보 손실액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만큼 혈세 낭비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