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의 작품 세계는 말년에 그린 추상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당대 한국 화가들 사이에서 ‘한국화의 현대화’는 시대적 과제였지만, 박래현처럼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듯한 혁신을 한 작가는 없었다. 재료 측면에서 종이와 전통 채색 안료를 사용했을 뿐, 그때까지 전혀 보지 못한 추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강렬한 붉은색을 바탕 삼아 동전 꾸러미 혹은 인간의 창자, 동굴 속 종유석을 연상시키는 파이프가 구불구불 이어진 형상은 때 묻지 않은 고대의 땅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다.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미국 뉴욕 아메리칸 인디언박물관에서 경험한 원시적 미술과 한국의 서민적 전통미를 결합하거나 엽전, 민속 가면에서 이미지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박래현의 추상 작품들은 평론가들에 의해 멍석, 엽전, 금줄 등의 이미지로 다양하게 해석됐고 ‘맷방석 시리즈’ ‘엽전 시리즈’라는 별칭을 얻었다.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국적인 것, 민족적인 것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낯선 박래현의 추상화 속에서도 애써 우리 것을 찾아내게 하는 국수주의적 몸짓을 평단에 은연중 강요한 게 아니었을까.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박래현 개인전을 기획한 김예진 학예사는 “이국적 모티프와 한국의 토속적 소재를 결합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과 보편적 양식을 획득하려 한 박래현 추상작품을 한국성에 가두는 게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엽전과 멍석의 굴레를 걷어내고 박래현의 작업을 원점에서 다시 살펴볼 것을 주문했다.
가정을 박차고 미국이라는 우주로 날아간 박래현. 그의 추상 작품에선 한국의 경계를 넘어 지구 단위의 보편적 문화를 지향하는 코즈모폴리턴의 면모가 읽힌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