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투기판’ 엘살바도르 비트코인 도입 한달 ‘혼돈’

입력 2021-10-07 00:03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주유소에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비트코인으로 지불하세요’라는 내용의 광고판이 붙어 있다. 지난달 엘살바도르 정부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승인한 뒤 장려책을 펼치면서 비트코인 사용은 늘어났지만 전 국민의 코인 투기행위도 일상화됐다는 비판도 함께 나온다. AP연합뉴스

모든 거래에서 이득 손실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저점에 사서 고점에 팔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일상이 ‘코인판’이다.

엘살바도르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한 지 7일로 한 달이 된다. 그런데 엘살바도르에선 투기 열풍이 불고 있다. 비트코인 거래가 일상이 된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살 때도 가격 변동을 고려하고 있다. 반면 인터넷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 노년층 등 디지털 취약층은 비트코인에 접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수도 산살바도르에선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 많은 대형 체인과 일부 소규모 기업이 비트코인을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전자제품 상점을 운영하는 산토스 엔리케 에르난데스는 “헤드폰, 충전기를 비트코인으로 사는 고객을 하루에 10명이나 본다”고 말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비트코인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공식 디지털 지갑 앱 ‘치보’ 사용자에게 30달러(3만5000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무료 제공했다. 이는 엘살바도르 월 최저임금 365달러(43만원)의 약 8%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공짜 돈’ 홍보는 효과가 있었다.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4일 치보 가입자가 3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전 국민의 절반가량이 비트코인 지갑을 개설한 것이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서 우버 운전자, 웨이터, 자영업자 등 모두가 치보로 비트코인을 하락에 사고 상승에 파느라 분주한 모습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금융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치보는 편리함을 바탕으로 완벽한 투기 도구가 됐다고 통신은 분석했다.

엔리케는 치보에 대해 “비트코인을 가격이 하락할 때 사들인 뒤 다시 오르면 달러로 환산하는 등 가격 변동에 대한 추측도 할 수 있게 됐다”며 “움직임을 예상하면서 이틀 동안 12달러를 벌었다”고 말했다.

한때 비트코인이 11% 급등하자 한 우버 기사는 자신의 딸들에게 “내 조언을 듣고 (치보) 앱을 다운로드했다면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제 가상화폐를 사용해야 한다. 세상은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가격 변동이 수시로 일어나면서 혼란에 빠진 이들도 있다. 커피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톰슨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통화가 어떻게 오르는지 이해가 안 되고 혼란스럽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시민도 “치보에 들어 있던 60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현금으로 인출하려 했으나 현금인출기 앞에 줄을 서자 자산이 57달러로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일상적 투기’는 고령자 등 디지털 취약층에겐 먼 나라 얘기다. 비트코인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40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버틸라 가르시아는 톰슨로이터에 “가상화폐를 사용하고 싶어도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치보 앱을 다운로드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장 폴 람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는 “비트코인은 쉽게 채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며 특히 송금을 받아야 하는 노인들에게 그렇다”고 지적했다.

인터넷 접속이 제한되고 현금 문화가 정착된 시골 지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엘살바도르의 인터넷 보급률은 50% 수준이다. 디지털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 디지털 화폐를 사용하면서 금융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도입 목표와 괴리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부켈레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수시로 비트코인 통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지난 4일 주유소에서 치보 앱으로 지불할 경우 갤런당 0.2달러 할인을 적용해주겠다고 밝혔으며 지난주엔 화산 지열을 이용한 비트코인 채굴을 시작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여론의 반응은 냉담하다. 엘살바도르 센트럴아메리칸대학(UCA)이 지난달 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비트코인 법정통화 채택 결정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68%를 차지했다. 엘살바도르에선 법정통화 지정 첫날부터 거의 매일 비트코인 반대를 외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여론 악화의 이유 중 하나는 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의 기술적 결함이다. AP통신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사용한 지 1주일이 지났으나 앱 문제가 계속된다고 보도했다. ATM에서도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서버가 수 시간 동안 다운되기도 했다.

개인정보 보호 문제도 뜨거운 감자다. 금융감시단체 글로벌 파이낸셜 인티그리티(GFI)의 줄리아 얀수라는 톰슨로이터에 “비트코인을 빠르게 채택한 것은 정부가 규제체계를 구축하고 이용자들이 치보 지갑을 만들기 위해 넘겨주는 개인 데이터를 보호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정보가 어떻게 저장될지, 누가 접근할지, 무엇을 위해 사용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비트코인이 하락세를 이어가면 부켈레 대통령은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 분석가는 “엘살바도르인들이 돈을 잃기 시작하면 그는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외화 송금 수수료 부담은 크게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또 급격한 물가 상승이나 하락은 발생하지 않았다. 동생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매달 150달러를 송금하고 있다는 록사나 루아나는 “15달러의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고, 이는 우리가 여기서 여성복을 파는 가족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