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고, 떠나도… 조선소는 별일 없이 돌아간다

입력 2021-10-07 19:51
2008년 ‘철’ 이후 13년 만에 다시 조선소 노동자 이야기를 소설화한 김숨 작가. 배는 철상자 300여개를 조립해 만드는데, 이 철상자 안에서 일하는 재하청 노동자들의 하루를 그렸다. 백다흠 제공

서늘하고 아름다운 노동소설 한 편이 출현했다. ‘세계 최강 조선업’을 자랑하는 한국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조선소 노동자와는 다르다. “난 12년 동안 조선소 파워공으로 일했지만 단 하루도 조선소 노동자였던 적이 없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야 쇠에서 빛이 나. 쇠는 피를 맛있어해. 피가 묻으면 쇠가 웃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배는 가로, 세로, 깊이가 20여미터에 무게가 60여t 나가는 철상자 300여개를 조립해 만든다. 철상자는 2∼3t짜리 철판 수십 장을 이어 붙여 만든다. 소설은 그 철상자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철상자 안에서 일하는 이들은 망치공, 용접공, 샌딩공, 배선공, 파워공, 취부공, 도장공, 발판공, 불 감시자 등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게 불리지만 대부분 물량팀 노동자다. 조선소 노동자들은 세 부류다. 정규직 노동자, 하청업체 노동자, 그리고 하청업체에서 재하청을 받는 물량팀 노동자. 물량팀 노동자는 조선소에서 일하지만 조선소에서 임금을 받지 않는다. 물량팀 반장들이 일당을 준다. 조선소가 아니라 반장들이 고용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나’(혜숙) 역시 물량팀 노동자다. 불 감시자로 용접공과 짝을 이뤄 용접 때 사방으로 튀는 불티가 화재로 번지지 않도록 감시한다.

소설은 철상자 속 다양한 작업현장을 비추며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조선소의 혹독한 노동 조건과 조선소에서 일하는 이들의 사연을 전한다. 철상자는 쇳가루가 날리고 페인트 냄새가 가득하고 용접 불꽃이 튀는 공간이다. 노동자들은 후각을 잃고 시각이 망가지고 인대가 파열된다. 스무 살 발판공이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크레인이 나르던 철판이 신호수를 덮친다.

“사고가 안 나는 게 용하지. 열흘 일거리를 닷새 만에 끝내라고 하니….”

“나도 허리 다쳤을 때 트럭에 실려 갔어. 내 얼굴로 떨어지는 용접 불똥을 피하려고 허리를 비틀다 3층 아래로 떨어졌지.”

“3층이면 양호하군.”

일하다 추락해서 죽고 퇴근길에 심장마비로 죽고 무더위로 달궈진 철상자 안에서 혼자 고립돼 죽는다. 그래도 조선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조선소는 별일 없이 돌아간다. 매일 500명 넘게 조선소를 떠나고 매일 500명 넘게 조선소 노동자가 되려고 이 마을을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소를 떠나지 못한다. “조선소가 아니면 갈 데가 없어. 내 남편도, 내 아들들도, 나도.”

노동자들의 대화 사이사이 발화의 주체나 의도가 불명확한 연극적인 대사, 시적인 문장들을 배치한 게 이색적이다. 노동자들이 실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들이 이런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소설의 공간인 철상자는 견고하고 어둡다. 바람도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퇴근이 아니면 나갈 수도 없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외부 사람들은 모른다. 김숨(47) 작가가 그려낸 이 철상자의 세계는 생계를 위해 자기 몸과 목숨마저 담보로 잡힌 채 위험하고 힘겨운 노동을 이어가는 우리 사회 가난한 이들의 조건을 완벽하게 상징한다.

김숨은 2008년 조선소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철’을 출간했다. 이후에도 ‘철(鐵)이 노래할 때’(2017년), ‘철(鐵)의 사랑’(2020년) 등 단편들을 발표하며 조선소 노동자라는 주제를 놓지 않았다. ‘철’이 산업역군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13년 만에 쓴 ‘제비심장’은 비정규직 엄마들의 이야기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