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첫째 주일은 세계의 많은 교회가 함께 제정한 ‘세계성찬주일’이었습니다. 삶의 자리가 서로 다르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주님의 식탁에 앉아 사귐의 교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글처럼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성찬주일이 되셨기를 빕니다.
시작은 자기로부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누가 큰 가’를 두고 철부지 논쟁을 합니다. 요한은 주님께 새로운 논란거리를 내놓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는데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서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정작 자신들은 말을 못 하는 아이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인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니, 요한은 제자로서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위기감은 38절에서 세 번에 걸쳐 사용된 ‘우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다”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그를 막았다”라고 했죠. 유대교 지도자 중 유독 ‘우리’를 앞세우며 타인에 대해 폐쇄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에세네파 사람들이었죠. 요한은 마치 그들처럼 ‘우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일을 막지 말라”고 하시지요. 예수의 이름은 어떤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그런가 하면 주님은 요한이 사용한 ‘우리’라는 표현을 받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40절)이라 하십니다. 구체적으로는 “물 한잔이라도 주는 사람”(41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 한 그릇’은 가장 소박한 대접을 의미하는 동시에, 꼭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박해와 핍박이 극심했던 1세기 기독교 상황을 생각하면 이렇게나마 제자들을 대접하는 건 사실상 지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후 교회 전통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했고 현대에 이르러 서구사회와 범종교계는 이들을 ‘세계 시민’이라 부릅니다.
얼마 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국민의 박수를 받으며 16년 총리직에서 자진해서 사퇴했습니다. 그녀는 2015년 정치적 부담을 떠안고 100만명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했습니다. 또 탈원전 조기화 등 국정을 안정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메르켈다움’ ‘메르켈 하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물론 그는 분명한 세계 시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다움과 그리스도인 하다는 무엇이냐’하고 말입니다.
받아먹는 신앙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고통에 신음하고 소외된 세계와 함께 세계시민으로 불릴 것을 환영합니다. 군부 쿠데타로 위기를 맞은 미얀마와 탈레반의 폭정에 신음하는 아프가니스탄. 기후위기로 탄식하는 시민들과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대량 죽음을 보는 세계 시민과 함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성찬주일, 주신 이의 뜻을 잘 받아먹으십시오.
어떤 신학자는 주님께서 인정하는 어린아이의 신앙을 ‘벌어먹는 신앙이 아니라 받아먹는 신앙’이라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는 것이 신앙이요, 받아먹은 만큼 나누며 섬기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가 하면 나눈 이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주와 함께 걸어가며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고 잘 자라, 자기 경계를 넓혀가는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인규 목사(청주 다리놓는교회)
◇청주 다리놓는교회는 갈라진 세계와 세대를 잇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믿음의 교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