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국왕부터 케냐·에콰도르 대통령까지 전 세계 지도자 수십명의 비밀자산 축적 의혹을 담은 문건이 공개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전 세계 유력 정치인과 부자 등이 비밀리에 해외 자산을 축적하고 조세회피처에 거액을 숨겼음을 보여주는 문건 ‘판도라 페이퍼’를 3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의혹 당사자로 지목된 전현직 국가정상만 30여명이다.
1999년부터 요르단을 통치해온 압둘라 2세 국왕은 1995~2017년 최소 36개 역외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와 워싱턴DC, 영국 런던의 호화 주택 14채 매입에 1억600만 달러 이상을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말리부에서는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인접 주택 3채를 약 7000만 달러에 사들여 가장 큰 단지 중 하나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재벌기업 ‘아그로퍼트’ 설립자로 2017년 선출된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는 정치 입문 전인 2009년 프랑스 남부에서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 2채를 2200만 달러에 매입했다. 그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워싱턴DC의 페이퍼컴퍼니, 모나코의 부동산관리회사를 통해 돈을 보냈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아내 명의로 런던 사무실을 650만 파운드에 구입하는 과정에서 해당 건물을 소유한 역외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세금 31만2000파운드를 아낀 사실이 드러났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거래에 대해 “불법이 아니고 블레어가 미리 재산세를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부유한 부동산 소유자가 ‘일반 영국인에게는 흔한’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허점이 부각됐다”고 지적했다.
문건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 28세였던 2003년 출산 몇 주 뒤 역외회사를 통해 모나코 해안가 고급주택을 소유하게 된 기록도 담겼다. 푸틴이 우회적으로 돈을 댔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의혹 당사자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거나 입장 표명을 거부했다. 압둘라 2세 변호인들은 국왕이 공적자금을 오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오는 8~9일 하원선거를 앞둔 바비시 총리는 트위터에 “불법이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판도라 페이퍼를 보도하면서 푸틴 관련 내용을 생략했다.
판도라 페이퍼는 전 세계 38개 지역 14개 역외 로펌 및 자산관리회사에서 유출된 1190만건 이상의 기록을 인용했다. 공동 취재에는 117개 지역에서 600명 넘는 언론인이 동참했다.
조사에 참여한 뉴스타파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홍콩의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해 미국 부동산을 매입했다는 의혹 등을 보도했다. SM은 “의혹을 받는 홍콩 소재 법인들은 미국 이민자인 이수만 총괄프로듀서 아버지가 한국에 보유하던 재산으로 설립된 것”이라며 “적법한 절차를 거쳐 환전·송금했다”고 해명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