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은 시장경제의 최대 적(敵)이다. 경쟁법을 만든 미국에서는 담합이 적발되면 천문학적 과징금은 물론 담합에 가담한 개인에 대한 징역형이 보편화돼 있다. 공정경제를 내건 문재인정부도 담합 과징금을 기존보다 2배로 늘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올 12월부터 시행된다.
그런데 정권 말 해운담합 사건 처리가 요상하다. 공정위 담합 조사가 마무리될 즈음 국익을 위해 해운업계를 봐줘야 한다는 일부 여론이 형성되면서 여당을 중심으로 국회에서 ‘면죄부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5월 HMM(옛 현대상선) 등 해운사 23곳에 심사보고서(검찰의 공소장 격)를 보냈다. 국내 해운사 12곳과 해외 해운사 11곳이 2003~2018년 16년 동안 한국과 동남아시아 노선 운송료를 담합했다는 혐의다. 담합 관련 매출액은 수십 조원 규모로 최대 8000억원의 과징금 부과가 가능한 대형 사건이다.
한진해운 파산 등 어려움을 겪다가 이제 막 기지개를 펴고 있는 해운업계는 초비상이 걸렸다. 해양산업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는 해운법 29조를 들어 공정위 제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조항은 화주 협의와 해수부장관 신고를 거칠 경우 ‘조건부’ 담합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공정위가 조사과정에서 적발한 122건의 담합행위에서 해운업계는 해수부 신고 등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해운업계과 해수부는 절차상 하자를 인정하면서도 원칙적으로 해운업계 담합은 허용되기 때문에 사전 신고 절차 위반 등에 따른 과태료만 부과하는 게 맞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과태료는 건당 최대 100만원이다. 해수부 논리라면 이번 담합은 최대 1억2200만원의 과태료로 끝날 상황인 것이다.
공정위와 해수부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해양업계 구하기’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은 해운사 담합 등 공동행위에 공정거래법 대신 해운법을 적용하도록 하는 해운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지난달 28일 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법안 심사 과정에서 ‘공정위가 심사 중인 사건에까지 소급 적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현재 논란이 된 해운담합 사건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목적의 법 개정안임을 재확인한 셈이다.
공정위 전원위원회가 사법부의 1심 재판 기능을 한다고 볼때 재판이 열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유죄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피고인에 대한 재판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당장 공정위를 피감기관으로 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도 농해수위의 무리한 입법시도에 대한 비판이 대두됐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 등 정무위 소속 의원들은 성명을 내고 “해당 해운법 개정안은 공정위의 해운 담합제재 무마를 위한 의도로 매우 좋지 않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사건이 동남아 등 다른 국적 해운사들이 포함된 국제카르텔 사건임을 감안하면 이런 시도는 ‘우물 안 개구리’ 입법이라는 지적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4일 “국제카르텔 사건은 공정위가 덮는다고 해서 다른 나라 경쟁당국도 조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해운담합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진 원인은 일단 해수부에 원죄가 있다. 해운사의 담합 신고를 제대로 처리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조사가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공정위와 해수부 간 이견이 발생했을 때 이를 교통정리하지 못한 청와대의 행태도 논란을 키웠다. 공정경제를 강조하는 청와대가 원칙대로 사건을 처리하라는 지침을 내렸다면 해수부와 농해수위 소속 여당 의원들이 이렇게까지 무리한 입법까지 시도했을 지 의문이다.
공정위 내부는 격앙된 분위기다. 이명박정부 때 4대강 사건, 박근혜정부 때 삼성물산 합병 사건의 외압 사태와 현 정부의 태도가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공정위 수뇌부의 무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공정위 한 간부는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국민지원금 100% 지급을 철회하기 위해 사표까지 썼는데 조성욱 위원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위원장이 생각이 있다면 당장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