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아가씨’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영화를 만든 박찬욱(58) 감독이 사진작가라는 부캐(부수적인 캐릭터)로 공식 데뷔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 1일 개인전 ‘너의 표정’을 열면서다.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취재진이 몰려 영화감독으로서 위상을 입증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불리지만 오늘만큼은 사진하는 사람으로 서고 싶다”며 새로운 정체성을 강조했다. 전시를 연 국제갤러리는 미술 작가인 두 살 아래 친동생 박찬경이 전속으로 있는 곳이다. 박 감독이 상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2018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동생과 함께 2인전 ‘파킹찬스’를 열어 사진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다. 서울 용산 CGV아트하우스의 ‘박찬욱관’ 입구에도 넉 달에 한 번씩 여섯 점의 사진을 교체 전시한다.
그는 “대학시절 사진 동아리를 하며 영화보다 사진을 먼저 만났다. 지금도 영화 촬영이나 로케이션 현장 등에서 계속 사진을 찍는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과 동시에 사진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도 갖고 평생 살아왔다. 내 내면에선 영화와 사진이 공존하며 서로 연결돼 있기에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전시에 그대로 쓴다”고 설명했다.
전시된 사진 30여점은 외할머니의 묘지, 농촌의 허수아비 등 한국에서 찍은 것도 있지만 인도네시아 발리, 크로아티아, 스페인, 모로코, 영국, 일본 등 영화 관련 일로 해외에 나갈 때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피사체는 주로 풍경과 정물이다. 그는 “어쩌면 풍경이고 정물이고 간에 모든 사물을 초상사진 하는 기분으로 찍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설명했다. 사물에서 사람의 표정을 읽는다는 의미다. 모로코의 호텔 수영장에 고이 접혀 있는 파라솔이나 런던의 한 클럽에서 본 의자들에선 곧 들이닥칠 손님을 기다리는 종업원의 표정이 읽힌다. 그래서 전시 제목도 ‘너의 표정’이다.
영화는 프레임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계산해 찍지만 사진은 우연히 눈에 훅 들어오는 장면을 찍는다. 영화가 ‘계획’이라면 사진은 ‘발견’이다. 그럼에도 영화 ‘아가씨’ 등에서 보여준 탐미주의적 시선이 사진에서도 읽힌다. 발리에서 찍은 사진이 그 예다. 바나나 사과 등 농익은 과일의 원색과 이를 탐하는 개미들의 검은색이 주는 색감의 대비가 탐스럽다.
피사체의 질감 역시 사물의 표정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강조하는 요소다. 영화 ‘박쥐’를 홍보하기 위해 외국에 나갔을 때 관객과 만남을 지친 채 기다리던 대기실의 낡은 가죽 의자 사진이 그렇다. 낡아서 반질반질해진 가죽의 질감이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다.
그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직업 때문에 외국을 다녀야 한다. 사진은 싫은 여행을 즐기려는, 그것에서 보람을 느껴 보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위로를 찾고자 시작한 사진작업이어서일까, 부캐여서일까. 전반적으로 치열함이 아쉽고 소재도 다소 산만하다. 12월 19일까지.
부산=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