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화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연출할 수 있어 좋아”

입력 2021-10-02 04:07
박홍민 감독이 지난달 7일 서울 중구 로컬스티치 약수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코로나19로 영화계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제작 환경이 나빠지고 비용은 늘어나는데 극장을 찾는 사람은 줄었다. 독립영화는 투자와 수익 등 모든 면에서 상업영화보다 훨씬 더 힘들다. 박홍민(39) 감독이 내놓은 독립영화 ‘그대 너머에’는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박 감독을 지난달 7일 서울 중구 공유오피스 로컬스티치 약수에서 만났다. ‘그대 너머에’는 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첫 장편 ‘물고기’(2013)로 부산국제영화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밴쿠버 국제영화제, 런던 국제영화제, 제네바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으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대 너머에’는 주인공 경호와 지연, 인숙이 서로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가장 두려움 없이 자아라는 감옥을 탐험하는 탐험가임을 입증하는 작품”(토니 레인즈 영화비평가) “기억과 시간에 관해 켜켜이 접혀 있는 주름들이 예측 불가한 짜릿함을 안긴다”(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 국내외 평론가의 호평을 받았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과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장편’ 부문, 제16회 오사카 아시안 영화제 경쟁작 등에 초청됐다.

배우 이주원(오른쪽)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모습. 농부영화사 제공

-‘그대 너머에’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여러 사람의 내면이 교차하는 모습,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믿음을 그리고 싶었다. 영화 속 세 인물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서로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같은 일을 겪었다고 모두의 기억이 같지는 않다. 지워지는 기억이 있는 반면 믿고 지켜야 하는 기억도 있다. 영화에서 인숙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고 딸 지연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관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믿게 된다. 관객들에게 존재와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물고기’부터 이번 작품까지 키워드는 기억 존재 망각 꿈 등인 것 같다.

“나란 사람 자체가 내면적인 것, 정서적인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번 작품은 뇌출혈로 쓰러진 지인의 아버지를 함께 병간호하면서 구상했다. 다들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보살핌에 많이 의지하며 살지 않나. 그런 게 없을 때 존재에 대한 인지가 가능할까.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려면 그 존재를 살피고 기억해야 한다. ‘물고기’를 만들 땐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다. 두 번째 장편 ‘혼자’(2016)는 무척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만들었는데 강박이나 피해의식 같은 감정들을 꿈 기억 등의 장치를 통해 객관화해보려 했다. 내적 고민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연구하다 보니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됐다.”

-작품에 골목길이 많이 나온다. ‘그대 너머에’ 주인공들도 골목길을 헤매는데, 상징성이 있나.

“영화에서 기호나 공간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잡한 골목이 있는 동네를 보면 주민들이 자기 물건들을 밖에 놔두거나 집앞을 꾸며놓는다. 의자를 두고 앉아있기도 한다. 골목길에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골목길을 멀리서, 높은 데서 보면 골목길과 사람들의 이미지가 군집화된다. 우리 내면에 기억이 쌓인 모습 같다. ‘그대 너머에’의 골목은 서로의 내면이 교집합 하는 공간이고 기억을 쫓는 공간이다. 골목길을 잘 보여주려고 롱테이크(끊지 않고 길게 촬영하는 기법) 방식을 택했다. 카메라 워킹도 각 인물의 시점이 뒤섞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박 감독(오른쪽)이 영화 ‘그대 너머에’를 촬영하는 장면. 농부영화사 제공

-작품마다 다양한 연출 기법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가상현실(VR)과 초근접 촬영을, ‘물고기’에서는 3D 촬영을 시도했는데.

“창작, 예술작업의 핵심은 영상 등을 통해 감정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사람들에게 어떤 정서적 인상을 주느냐인 것 같다. 감정을 유발하는 데 어떤 방식이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겁 없이 해보려고 하는 편이다. 백지상태에서 여러 기술을 시험해보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 영화 역사가 100년을 넘어가면서 편집 기호나 연출 방식이 대부분 정리돼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른 게 있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 주제의식 안에서 안정적으로 정서를 전달하는 건 상업영화 쪽에 잘하는 분들이 많다. 작은 영화(독립영화)에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연출할 수 있다. 내겐 중요한 부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영화 제작 현장이 어렵다. 독립영화는 어떤가.

“많이 어렵다. 발표되는 독립영화 작품들을 보면 패턴화돼있다. 학교 졸업작품이나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이 아니면 만들기가 어려운 구조다. ‘그대 너머에’ 각본을 쓰고 나서 2년간 제작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의미 있는 고민을 담은 영화인데 찍지 않으면 사라진다. 작품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몇 년간 모은 돈을 다 털어 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만들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거다. 대부분은 영화 제작 자체가 어렵다. 운신의 폭이 점점 더 좁아지는 느낌이다.”

-‘한국의 데이비드 린치’ ‘한국의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영화 작업을 힘들게 하다 보니 몇몇 평론가나 기자가 좋은 마음으로 해준 말이다. 토니 레인즈 등이 좋게 봐주는데,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 린치나 놀란 감독과 유사한 포인트를 찾아 높게 평가해줬다. 저와 비교하기엔 워낙 거장들이어서 죄송하고 부담스럽다.”

-차기작 구상은. 기억과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할 건지.

사진=김지훈 기자

“다음엔 ‘활력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 영화를 만들 당시의 고민을 기반으로 작업해왔기에 지금까지 작품엔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반영돼 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캐릭터, 다른 상황 속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싶다. 삶의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열정을 갖고 나아가는 인물이면 좋겠다. 뭔가를 돌파하고 변화시키는, 부딪치고 이겨내는 인물을 그리려고 구체화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지 않을 땐 뭘 하나. 창작에 영감을 주는 게 있나.

“자는 것 좋아하고, 걸어 다니는 것 좋아한다. 독립영화 작품들도 많이 챙겨본다. 들국화의 음악 중에 ‘제발’을 즐겨 듣는다. 어디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작품과 연결하기도 한다. 사실 요즘엔 새로운 일을 배우고 있다. 이번 영화부터 직접 배급에 나섰다. 혼자서 창작만 생각했는데,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 경험하는 게 많다. 다른 창작자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요즘 정말 바쁘다.”(웃음)

어릴 때부터 영화광이었던 박 감독은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아방송예술대에서 연출을 전공한 뒤 동국대 영상대학원에서 영화연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기존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시도를 해온 박 감독을 “독보적이고 고집스러운 예술가, 카메라로 고민하는 구도자”라고 평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