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 지칭한 고영주(사진)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치적 논쟁의 영역에 법원이 개입해 사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공적 인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판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법학계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6일 고 전 이사장의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한 개인이 공산주의자인지의 여부는 개인이 갖는 생각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며 “‘공산주의자’라는 발언 부분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구체적 사실의 적시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고 전 이사장의 발언은 문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에 대한 의견 교환을 통한 검증 과정의 일환이며, 표현 자유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결론이다.
고 전 이사장은 2013년 1월 보수 성향 시민단체의 신년하례회에서 “부림사건 변호인 문재인은 공산주의자이고,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해 재판을 받아 왔다. 영화 ‘변호인’의 소재로 유명한 부림사건은 1981년 20여명의 교사와 학생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재심 끝에 2014년 무죄 판단을 받았다. 고 전 이사장은 1982년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의 수사 검사였다. 문 대통령은 이 사건 재심 변호를 맡았다.
하급심 판단은 1심 무죄와 2심 유죄로 엇갈렸다. 2심은 “고 전 이사장의 발언이 단순히 문 대통령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나 부정적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정치적 이념은 평가적으로 말해질 수밖에 없으며 증거를 통한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공산주의자로서의 객관적·구체적 징표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 이상 그 평가는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법원의 경향은 “공론장의 공적 인물, 공적 관심사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돼야 한다”로 모아진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했던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은 무죄가 확정됐다. 문 대통령을 ‘간첩’이라 칭한 전광훈 목사도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법학계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점차 폐지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죄를 간통죄에 비유해 “개인과 개인의 다툼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윤해성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공익성인데, 공익성을 판단할 정확한 잣대도 없어 많은 것이 애매하다”고 말했다.
허경구 박성영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