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계급 등 모든 주제 유쾌하게 슬쩍… ‘넛지’ 같은 비엔날레

입력 2021-09-12 20:34
홍콩 출신 융마 감독이 총지휘하는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1월 21일까지 ‘하루하루 탈출한다’를 주제로 열린다. 쿠웨이트 출신 작가 무니라 알 카디리가 중동 드라마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위트 있게 고발한 영상 작품 '비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중동 산유국의 상류층 가정, 금색 커튼이 호화로운 거실에서 남녀가 대화를 주고받는다. 언어만 다를 뿐 우리나라 재벌 소재 드라마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그런 현장에 뜬금없이 이주 노동자인 가사도우미가 무표정한 얼굴로 주스를 나르고 청소기를 돌리는 합성 영상이 개그처럼 등장한다. “이건 뭐지” 웃다가도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이 영상 작품은 쿠웨이트 출신 무니라 알 카디리가 만든 ‘비누’로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서울비엔날레)에 나왔다.

서울비엔날레가 최근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해 11월 21일까지 70여일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1년 연기돼 이번에는 3년 만에 열렸다. 홍콩 출신 융마(42) 감독이 국내외 작가 41명(팀)을 초청해 ‘하루하루 탈출한다’를 주제로 영상, 설치,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주제는 영상 작품 ‘비누’가 시사하듯이 ‘뭘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방점이 찍혔다. ‘비누’는 아랍의 ‘소프 오페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프 오페라는 통속적인 소재의 드라마를 일컫는 용어로 초기에 비누회사 광고가 많이 들어가 비누를 뜻하는 영어 소프(soap)가 들어간다. 이 영상 작품은 석유로 돈을 번 중동 국가의 상류층이 대저택을 유지하기 위해선 블루칼라의 노동이 들어감에도 중동 드라마에 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데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실제 드라마 장면을 짜깁기해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 운전사 파출부 등을 등장시켜 투명 인간 취급받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환기한다.

서울비엔날레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인 융마는 특정한 주제를 선택하는 대신 인종주의, 젠더, 계급, 정체성, 환경, 이민, 젠트리피케이션 등 우리 일상을 관통하는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룬다. 정색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대신, 은근히 눙치듯, 때로는 웃음으로 위장한 채 꼬집는 방식을 취한다.

감독의 이런 취향은 전시장 도입부에서부터 확인된다. 입구에는 맛보기처럼 영국 작가 브리스 델스페제의 아이콘 같은 작품 ‘바디 더블’이 나온다. ‘바디 더블’ 연작은 남녀 주인공의 격렬한 키스 장면이 빙빙 도는 영상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히치콕 등 컬트영화 대가가 만든 유명 장면의 배경을 차용한 데서 비롯된다. 반전은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지는 여주인공 때문에 일어난다. 남성인 작가가 여자로 분장한 것임을 파악하고 처음엔 웃게 되지만 곧 젠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독일 작가 헨리케 나우만의 설치·영상 작품. 가상의 신발 브랜드 부티크에 전시된 짝짝이 구두를 통해 통일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독일 작가 헨리케 나우만은 패션 구두 가게를 전시장에 차렸다. 얼핏 같아 보이는 한 쌍의 구두지만 자세히 보면 짝짝이라 통일의 어려움을 암시한다. 북한 여군에게 유행했던 통굽도 영상과 함께 작가가 만든 패션 구두로 나와 보는 재미가 있다. 중국 작가 리 랴오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로 비난받은 우한에 봉쇄령이 내렸을 때 마침 그곳에 있었다. 작가는 텅 빈 도심 거리에서 코로나 전염병을 증거라도 하듯이 긴 작대기를 들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 내놨다. 황량한 도시와 장대 끝에 걸린 비닐봉지의 낯선 조합이 우스꽝스러운 틈새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미국 작가 폴 파이퍼는 성상 행렬이라는 종교적 의식을 저스틴 비버 같은 아이돌의 공연과 대비시킨 영상을 통해 아이돌이 우상화되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중국 작가 리랴오가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한 중국 우한에서 펼친 퍼포먼스 영상 '모르는 채로 2020'.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처럼 작품들은 각각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건드린다. 하지만 하나같이 정색하고 고발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뜨겁거나 맵다기보다 달콤쌉싸름하다. 융마 감독은 자신의 전시 방식에 대해 미국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2017~20)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 시트콤은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쿠바계 미국인 3대가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 인종주의, 젠더, 계급, 이민, 젠트리피케이션, 섹슈얼리티, 정체성 문제 등 한 사회가 용광로처럼 안고 있는 이슈를 유머러스하게 건드린다.

감독은 이를 도피주의라 표현하지만 발언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융마식 전시 문법에는 행동경제학 용어인 ‘넛지’가 더 어울린다. 넛지(팔꿈치로 살짝 쿡 찌르다)는 강압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으로 사람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그 때문에 이번 전시는 2015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감독 오쿠이 엔위저의 도발적인 방식과 대척점에 서 있다. 서울비엔날레에 춤을 다룬 영상이 많은 것도 춤이 갖는 유쾌하면서도 암시적인 효과가 넛지식 전시 문법에 어울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컨대 파키스탄 출신 바니 아비디 작가는 젊은 여성이 각각 춤추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병치하는데, 춤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못 읽게 편집함으로써 우리 안에 내재한 경쟁 심리를 상기시킨다.

회화나 조각, 설치보다 영상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작가의 이력과 관련 있어 보인다. 베니스비엔날레 홍콩관 공동큐레이터를 지낸 융마는 2011∼16년 홍콩의 M+미술관에서 무빙 이미지 분과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이번 서울비엔날레는 2017년 카셀 도큐멘타의 대규모 물량 공세가 도마 위에 오른 이후 새로운 추세가 된 ‘간소주의’의 연장에 있다. 한국에서도 2018년 김선정 대표가 총지휘한 광주비엔날레가 국내외 작가 163명을 초청해 관람 피로증을 불렀다. 코로나 여파로 올봄에 열린 광주비엔날레가 69명, 부산비엔날레가 67명으로 참여 작가가 반으로 준 것은 그 반동이다. 서울비엔날레는 41명으로 더 단출하다.

전시장에는 칸막이가 없다. 작품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섬처럼 흩어져 있다. 여백의 미도 돋보인다. 1층의 넓은 벽면에는 한국 여성 작가 고등어의 드로잉 연작 12점을 건 게 전부다. 한국 작가로는 고등어 외에 듀오 그룹 취미가(家), 장윤환, 장영혜중공업, 홍진훤, 김민, 강상우, 정금형 등이 참가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