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가 탄소중립 계획 수립에 국민 의견을 반영하겠다며 만든 탄소중립시민회의(시민회의)의 첫 활동이 12일 마무리된다.
정부는 시민참여모델을 통해 국민적 여론을 수렴했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선 탄중위가 정보 공개에 소극적인 탓에 시민회의의 숙의 과정이 적절했는지 점검할 수 없었다며 시민회의가 정부의 의중을 시민의 뜻으로 포장하는 데 이용되기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후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이 논의를 주도하는 제대로 된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민회의엔 지역·성별·연령 등을 고려해 무작위 추출한 만 15세 이상 국민 530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지난 한 달여간 기후 문제에 관한 온라인 학습을 진행했다. 이어 11~12일 쟁점별 종합토론을 거쳐 설문조사에 응한 뒤 그 결과를 담은 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한다. 이 권고안은 10월 말 확정될 탄소중립 시나리오 최종안에 일부 반영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회의는 2017년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설치했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물론 강연 내용 등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시민회의 운영이 적절했는지 검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재각 전 기후위기 비상행동 공동운영위원장은 10일 “참여 시민이 무슨 자료로 학습하고, 어떤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았는지 알려진 게 전혀 없다”며 “(이러니 시민회의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생길 수 없다”고 말했다. 유럽 등지의 에너지 전환 과정을 연구했던 박진희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영국에선 기후시민의회가 운영되는 동안 실시간으로 모든 게 중계됐다. 그래서 선정된 시민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지만 한국에선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고 짚었다.
이에 대해 탄중위 관계자는 “정보를 숨기려고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게 아니다. 국회의 자료 요구나 시민단체의 정보공개청구가 있을 땐 공개했다”며 “탄중위가 시민 생활에 밀접하거나 논란이 되는 주제를 뽑았고, 시민들은 그에 대해 토론했다”고 논의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국민의힘 윤두현 의원실이 탄중위로부터 받은 관련 자료를 보면 시민참여단의 학습은 총 5시간47분 분량의 동영상으로 진행됐다. 대부분 정부기관 홍보영상이나 TV 다큐멘터리 등이다. 전문가로부터 직접 강연을 듣는 ‘시민탄소교실’엔 8명의 전문가가 섭외됐다. 이 중 6명이 탄소중립위원, 나머지 2명은 정부 산하 연구기관인 에너지기술평가원과 국립산림과학원 소속이다. 대부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방향에 우호적인 이들이라 강연자 섭외가 편향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가 논의 주제를 일방적으로 정한 것도 문제다. 기후 정책과 에너지 전환을 연구해온 구준모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은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해 기후위기를 심화시켜온 경제·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논의를 해야 하는데, 의제 설정부터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현행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무작위 표본 추출로 뽑힌 시민이 기후위기 대응 정책 수립에 ‘국민 대표’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상현 서강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교수(환경사회학)는 “기후위기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고 이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게 필수적인데 무작위 추출 표본에 의존해선 그렇게 하기 어렵다”며 “소규모 표본집단이 정부가 이미 정해놓은 제한적 선택지 몇 가지를 두고 극히 짧은 시간 논의한 후 여론조사를 하는 건 결코 시민 참여라고 볼 수 없다”고 질타했다.
기후위기 대응 정책 수립에 시민 참여 방식을 도입한 대표적 국가인 프랑스는 2019년 10월 ‘기후시민의회’를 발족시켰다. 프랑스 정부가 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유류세 인상에 반대한 ‘노란 조끼 시위’가 발단이 됐다. 한국처럼 성별과 나이 등 인구 대표성을 고려해 무작위 추첨된 시민 150명이 9개월에 걸쳐 활동했다. 시민들은 활동 결과 149개 권고안이 담긴 460쪽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권고안엔 탄소 다배출 수입 상품에 대한 국경세 도입, 대중교통 이용 장려를 위한 기차표 관련 세금 인하 등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하는 정책 제안이 담겼다. 정부가 정한 몇 가지 쟁점에 한 달 남짓 토론하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탄중위는 앞으로 부처별 탄소중립 이행계획 수립 등에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로 시민회의를 계속 운영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회의라는 틀 자체의 한계가 분명할 뿐 아니라 운영상 문제까지 드러난 만큼 새로운 시민 참여 기구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크다.
채효정 녹색당 정책자문위원은 “탄중위의 부족한 민주적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시민회의가 동원된 것에 불과하다”며 “시민사회가 직접 정한 시민 대표와 노동자·농민 등 기후위기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이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원점에서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명진 기자 박채은 천현정 인턴기자 a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