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치며 공감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서양인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비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양인은 정확히 맞는 것을 추구하지만, 한국인은 틈과 여유를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 한국의 주택 문을 예로 들었습니다. 서양식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요즘 아파트는 문이 문틀에 정확히 들어맞아 빈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주택은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문이 엉성했습니다. 문과 문틀 사이가 꼭 맞지 않았죠. 시골 초가집은 제대로 다듬지도 않은 나무로 문틀을 만들어서인지 문과 문틀 사이로 손가락이 드나들 정도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문을 닫아도 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덥혀도 방안에 둔 물이 얼거나 입김이 나올 정도였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문풍지입니다. 문 가장자리에 한 뼘 정도 크기의 문풍지를 붙여 틈을 막았던 것이죠. 문과 문틀이 잘 맞지 않으면 정확히 잰 뒤 다시 만들면 될 텐데 우리 조상은 그대로 둔 채 문풍지를 바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호불호가 나뉘는 부분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문화에서 한국인의 비과학성을 꼬집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측정해 빈틈이 없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 대강대강하는 문화가 생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가는 안 좋은 문화도 자리 잡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조상의 이런 모습에서 여유를 본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맞지 않아도, 그 틈으로 황소바람이 불어와도, 심지어 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아도 “이만하면 됐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 삶이 서양인과 같은 정확함에 기초해야겠지만 우리 조상과 같은 마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사에 정확하고 일 처리에 빈틈이 없고 계산에 정확하며 속임수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물쩍 때우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될 일이죠.
건물을 지을 때 철근을 대충 넣는 식으로 사는 인생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빈틈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완벽한 사람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세상엔 한 사람도 남지 못할 것입니다.
성적이 좋지 않고 실수를 한 아이는 가정을 떠나야 하고, 업무 처리가 미숙한 직원은 회사를 떠나야 한다면 어떨까요. 실직해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부모는 가정을 떠나야만 할까요. 이건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살맛을 느끼는 건 실수투성이의 아이도 부모 품에서 사랑받고, 실수가 있어도 직장 동료들이 격려해주며 실직한 아버지도 자녀들이 받들어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니 정확히 가을바람을 주십니다. 우주 만물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황소바람이 불어오는 틈도 사랑하십니다. 정확하지 못한 인생도 받아주십니다. 여기서 용서와 구원의 복음이 나옵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자신도 불완전하면서도 남에게 완벽함을 요구합니다. 너무 꽉 짜인 삶, 빈틈이라곤 용납하지 않는 태도, 작은 실수도 받아주지 않는 냉혹함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이런 반응이 두려워 틈이 생긴 이유를 거짓말로 둘러대며 “뭐 어때서, 나만 그런가”라며 자기방어를 합니다.
대선 정국에 접어들면서 국민이 보고 견디기 힘든 일이 많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김운성 영락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