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탄수화물 없이는 작가도 없다

입력 2021-09-08 04:05

일복이 터진 8월을 보냈다. 한 달간 거의 잠들지 못한 채로 원고를 작업해야 했다. 내 모습은 흡사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출되는 한껏 과장된 작가 캐릭터 같았다. 매일 마감에 쫓기느라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작업하기 좋도록 머리는 하나로 질끈 동여맨 채 잠시도 안경을 벗지 못했다. 깨끗하던 책상은 퇴고를 기다리는 프린트물로 가득했으며 연필 하나조차 내려놓을 공간이 없어 내 귀에 연필을 꽂아야 했다. 모든 휴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작업했는데도 마지막 남은 원고의 마감일을 지키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막판 보름간은 얼음물로 세수해가며 잠들지 않았으니 시간적으론 충분했다. 다만 한번에 너무 많은 분량의 원고를 처리하려다 보니 나중에는 글자가 글자로 보이지 않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글자가 보이지 않는 지경까지 갔었다. 처음에는 까만색 얼룩으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까만색 선으로만 보였다. 눈을 힘껏 비벼도 여전했다. 뇌는 이미 용량을 넘어선 지 오래돼 기능을 멈춘 상태였다. 이대로는 도저히 원고를 손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마감일을 일주일이나 늦춰야 했다.

늦춰진 마감일 중 첫날은 잠만 잤다. 잠자고 일어나면 글자가 글자로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까만색 선으로만 보였다. 다음 날은 먹기만 했다. 그동안 다이어트 때문에 거의 먹지 못했던 탄수화물을 섭취했다. 배 터지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때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뇌도 작동을 시작했다. 얼른 원고를 붙잡았고 연장된 마감일에 맞춰 무사히 원고를 송고할 수 있었다. 탄수화물의 힘은 그야말로 위대했다. 모든 변화를 몸으로 느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탄수화물은 뇌의 유일한 에너지원이라는 말이 맞았다. 다이어트로 인해 몸이 가벼워지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는 좋은 작품을 위해서라도 탄수화물을 야무지게 섭취해야겠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이원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