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긴급한 소방 출동 시 불법 주정차 차량을 강제로 제거·이동할 수 있는 ‘강제처분’ 조항이 일부 개정·시행됐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실행된 긴급출동 사례는 전국적으로 단 한 건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긴급 상황’을 입증하기 어려워 현장 소방관들의 강제 처분이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4월 11일 오후 3시14분쯤 서울 성내동 한 골목 주택 지하 1층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가 서울 강동소방서에 접수됐다. 신고현장은 강동소방서에서 출동 후 5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골목길 주정차금지구역에 불법 주차된 승용차 2대가 장애물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사이렌을 크게 울리며 불법주차 차량을 옮겨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명의 차주는 곧바로 나왔지만, 나머지 차량의 차주는 응답이 없었다. 긴급출동 상황에서 화재진압용 덤프트럭이 차량 사이를 지나갈 수 없어 소방대원들은 애를 태울 뿐이었다.
육안으로 본 신고 현장은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 화재 위치도 지하 1층이어서 만약 불이 크게 번진다면 내부에 있던 사람이 출구를 쉽게 찾지 못할 확률이 컸다. 그 경우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질식할 위험이 있었다.
결국 현장 지휘관이었던 신모 진압대장은 “차량을 파손시켜서라도 골목길을 지나가자”는 판단을 내렸다. 신 대장의 지휘로 화재진압용 덤프트럭은 불법 주차된 차량 옆면을 긁으며 겨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주택 내부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잠을 자던 시민 1명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 강제처분 조항 개정 이후 2년 10개월 만에 차량 파손의 위험을 감수하고 긴급출동을 한 전국 첫 사례였다.
2017년 2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를 계기로 2018년 6월 긴급한 소방 출동 시 불법 주정차 차량을 강제로 제거·이동할 수 있는 ‘강제처분’ 조항이 일부 개정·시행됐다. 당시 불법 주정차 차량 때문에 현장 진입이 어려워 논란이 일었다.
현장에서는 강제처분 이후 민원제기와 보상 문제를 우려해 소방관들이 강제처분에 소극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면책되려면 ‘긴급한 상황’이라는 점이 입증돼야 한다. 하지만 사고현장에 도착하기 전 신고 접수 내용만으로는 긴급한 소방활동이 필요한지 단정 짓기 어려워 적극적인 대응을 꺼린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의 한 소방관은 “강제처분으로 차량이 파손되면 현장 소방관들이 소송이나 민원 등의 부담을 더 크게 질 수 있다는 인식이 아직 강하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소방당국은 강제처분보다는 사전 단속을 통해 소방차량 이동 경로의 불법 주정차 차량을 줄이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소방청 관계자는 “사전 단속으로 분쟁의 소지를 줄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크다”며 “불법 주정차 차량에 손상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손실보상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법에 명시됐지만 실제로 면책을 받은 사례가 나오지 않은 점도 현장 적용이 소극적이었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첫 강제처분 사례가 나온 데는 전국 소방관들의 배상책임보험 한도가 상향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 전국 소방관들의 배상책임보험 한도는 기존 연간 2억~10억원에서 연간 70억원으로 상향됐고, 건당 한도도 기존 3000만~3억원에서 5억원으로 늘어났다. 소방관의 자기부담금도 아예 사라졌다. 이번에 강제처분을 받은 불법 주차 차량은 소방청에서 직접 사후처리를 진행했다. 또 차주가 자신의 불법 주차 과실을 인정하면서 현장 소방관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신 대장은 “향후 다른 현장에서도 불법 주정차 차량 때문에 인명구조가 늦어지는 고충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성필 기자 f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