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태우고 부르카 사 왔다”… 아프간 시민 절망의 아침

입력 2021-09-02 04:05
미군이 철수를 마친 다음 날인 31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호스트시 한 거리에서 군중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국, 프랑스, 영국 국기로 뒤덮인 관을 든 채 장례식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나는 울면서 청바지를 불태웠고, 오빠는 나가서 부르카를 사 왔다.”

영국 가디언이 미군 철수 다음 날인 31일(현지시간) 평소와 다른 하루를 맞이한 한 아프간 시민의 처지를 전한 장면이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이후 탈레반은 축포를 터뜨렸지만 그들의 치하에 놓인 아프간 도시 전역은 깊은 절망에 잠겼다. 청바지를 불태우고 온몸을 두르는 옷인 부르카를 준비하는 등 아프간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우울감을 토로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아프간 여성 리파 아흐마디(가명)는 탈레반의 방침에 어긋나는 청바지와 다른 옷가지를 태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아흐마디는 “청바지를 불태웠고, 희망도 함께 불태웠다. 그 무엇도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미군이 철수를 마친 다음 날인 31일(현지시간) 여성 2명이 온몸을 덮는 부르카를 입은 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한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0년 동안 서구의 지원을 받는 정부 아래서 교육과 고용 등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청년 세대인 아흐마디는 3주 전 한 세관 사무소에 취직하는 데 어렵게 성공했지만 불과 한 달도 안 돼 일자리를 잃었다. 아흐마디는 “많은 여성이 탈레반으로부터 사무실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고 쫓겨났다”며 “내 자리엔 수염을 길게 기른 남성이 앉아 있었다”고 전했다.

이제 옷차림은 생과 사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됐다. 아프간 북부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마자르이샤리프에 사는 자바르 라흐마니(가명)는 탈레반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아프간 전통의상을 입기로 결정했다. 라흐마니는 “살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한다”며 “탈레반 통치하에서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다. 수염이나 옷차림은 다른 나라에선 매우 사소한 것일지 몰라도 여기선 목숨을 위협하는 투쟁”이라고 토로했다.

라흐마니는 “한 세대의 꿈이 이렇게 된 것은 탈레반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며 “이렇게 떠날 거면 애초에 왜 왔느냐”고 분노했다.

탈레반은 과거 집권기(1996~2001년) 때보다 유연한 통치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부르카를 쓰지 않고 외출한 여성을 총살하고, 직장에서 여성들을 내모는 등 과격한 행태가 전해지면서 탈레반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식량난도 남은 아프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레쉬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아프간에 인도적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촉구했다.

구테레쉬 사무총장은 “아프간 인구의 거의 절반인 1800만명이 생존을 위한 긴급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고 3명 중 1명은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며 “또 5세 미만 어린이 과반이 내년 급성 영양실조에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구테레쉬 사무총장은 “지금 어느 때보다 아프간 어린이와 여성, 남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필요하다”며 “모든 회원국이 도움이 필요한 아프간인들을 위해 최대한 지원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