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복수는 정의 구현하기보단 또 다른 억울함 낳고 불행하게 해

입력 2021-09-03 03:07

‘빙점’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신입생 때 TV 드라마였습니다. 내용이 파격적이라 흥미가 끌렸지만 당시 원작을 구해 읽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용서라는 주제가 제 인생에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반 때 폐결핵에 걸려 꼼짝없이 하숙방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됐습니다. 천정을 보며 힘없이 ‘하나님, 대학 시절 동안 공부한다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못한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문득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떠올랐습니다. 24세 때 폐결핵과 척추카리에스에 걸려 13년간 병상에 누워 지냈다는 일본 홋카이도의 전직 여교사. 저는 ‘빙점’을 구해 읽었습니다. 요양 생활 동안 그녀의 전집은 마치 생명의 양식 같았습니다.

‘빙점’은 1100쪽에 걸쳐 전편(1965년)과 속편(1971년)으로 구성됩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어느 가정과 그 주변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이 책에서 인간의 원죄가 자기 중심성에 있음을 가족 사이에 얽히고설킨 온갖 타래를 풀어가며 전합니다. 자기 일이라면 쉽게 용서하면서도 남의 일이라면 쉽게 원망하는 인간의 밑바닥 현실. 몸이 낫고 신학교에 들어와 지난 20년간 목회자로 지내오며 ‘빙점’의 메시지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남에게 말 못 할 사정,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는 빙점의 진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목회 현장에서 깊이 절감했습니다.

초갈등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 한 맺힌 목소리가 높아갑니다. 하지만 ‘빙점’은 원한과 복수는 정의를 구현하기보단 또 다른 억울함을 낳고 많은 이를 불행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합니다. 무엇보다 복수의 칼끝은 결국 복수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이 책은 정교하게 짚어 내지요. 지난겨울 다시 정독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자신이야말로 가족과 교우들과 이웃 모두를 통해 주님께 일흔 번에 일곱 번 용납 받으며 살아왔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본래 신문 연재여서 하루 한편씩 읽어도 좋습니다. 늦가을 시작해서 한겨울을 지나 새봄이 다가올 즈음 완독한다면, 내 안의 ‘빙점’이 더는 어는 점이 아니라 녹는 점이 되게 하시는 주님을 ‘처음 만나는 분’처럼 만나실지도 모릅니다.

송용원 장로회신학대 조직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