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사이 잘 유지할 때 건강한 공동체 이룰 수 있어” [저자와의 만남]

입력 2021-09-03 03:06 수정 2021-09-03 15:09
정광일 목사가 지난달 27일 경기도 가평 가락재 영성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가평=신석현 인턴기자

숲에서 길어 올린 묵상이다. 샘물처럼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 ‘내 잔이 넘친 후에야’(시 23:5) 세상에 내놓는다.

한국의 숨어있던 영성가인 가락재 영성원 원장 정광일(69) 목사가 십여년간의 묵상을 담은 ‘말씀 단상’(삼인)을 출간했다. 지난달 27일 짙은 녹음으로 둘러싸인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가락재 영성원 도서관에서 정 목사와 마주 앉았다. 정 목사는 신약 성경 누가복음 5장을 펼쳐 보였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5-16) 여기서 ‘한적한 곳’이 헬라어로 ‘에레모스’입니다. 본래 유대 광야를 가리키지만, 꼭 사막이 아니더라도 한적한 곳, 피정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때때로 산을 찾으셨습니다. 기도하려고 쉬려고 그리고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홀로 있으며 다시 광야에서 사탄과의 씨름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말씀 단상’ 첫 글의 제목이 ‘산(山)과 에레모스’다. 산은 정복의 대상, 때로는 길벗이지만, 궁극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 뜻을 헤아리던 공간이다. 가락재 영성원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양팔로 품어 안은 장락산 서쪽에 있다. 한국에선 산이 광야다. 영성원은 ‘광야의 영성’을 기억하며 영적 재충전을 하는 곳이다.

정 목사는 연세대 철학과와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이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유학을 마치고 1990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프랑스 떼제 공동체와 불어권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를 접하고 난 후 대천덕 성공회 사제의 예수원과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농군학교처럼 한국형 영성 공동체를 꿈꿨다. 그의 부친은 서울 한강교회 원로인 정운상 목사로 한국의 ‘무디’로 불린 이성봉 목사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부친과는 다른, 부흥사의 길이 아닌 영성가의 길을 택한다.

자기 비움과 내려놓음의 영성을 강조하는 그를 부흥에 목맨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십년 지나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피로사회’임을 자각한 후에야 이곳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장소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숲이 우거진 연후에 새가 찾아오듯 피정의 공간을 찾아오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책은 이런 성도들에게 부정기적으로 보내던 이메일 편지를 묶은 것이다. 쉼과 숨과 섬,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정 목사는 “쉼은 하나님 품에서 쉬고 누리는 것, 숨은 하나님이 숨을 넣어준 것을 기억하고 기도로서 하나님과 호흡하는 것, 섬은 다시 일어선다는 뜻으로, 마른 뼈가 세워지고 연약한 무릎으로 서는 것 이외에도 멈춰섬 물러섬 나섬 등등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책엔 거리두기에 대한 단상도 담았다. 정 목사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형제 사이에도 나름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면서 “이때의 거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고 남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그는 “이 거리의 의미를 부정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혹 내가 남을 존중하기보다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아야 한다”며 “건강한 공동체는 서로의 사이를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재앙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가 놓치지 말아야 할 메시지다.

가락재는 십자가를 뜻하는 가(架)에 즐거울 락(樂), 집 재(齋)가 합쳐졌다. 십자가가 눈물과 고통뿐만 아니라 즐거움이 될 수 있는지 정 목사에게 물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수직적 연결, 나와 이웃의 수평적 연결이 십자가의 의미”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시에 일어날 때 얻는 기쁨, 십자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기쁨까지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3040세대에게 가락재 운영을 맡기고 곧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가평=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