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안했고, 못할 작품 만들어 콘텐츠 제약 넘고 싶었죠”

입력 2021-09-04 04:06 수정 2021-09-04 04:06
‘신비아파트’를 만든 석종서 국장(PD)이 지난달 12일 서울 마포구 스튜디오 바주카에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신비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한결 기자

“여보세요. 안녕, 난 강림이야. 이렇게 전화로 만나니까 더 반갑다. 자기소개부터 해줄래.”

“난 초등학교 5학년 연아라고 해.”

“아 그렇구나, 나랑 동갑이네. 연아는 나의 어떤 점을 좋아하게 됐는지 궁금해. 알려줄 수 있니.”

“너의 따뜻한 마음이 좋아.”

“나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주다니 고마워.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쑥스럽네.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열린 ‘영통팬싸’(영상통화 팬사인회의 줄임말)의 한 장면이다. 영통팬싸는 코로나19로 대면 팬미팅을 할 수 없게 된 연예인들이 팬들과 영상통화 등을 통해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강림이는 아이돌그룹 멤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의 남자주인공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선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신비아파트의 신박한 도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지난달 12일 서울 마포구의 스튜디오 바주카 회의실에서 신비아파트를 만든 석종서 국장(PD)을 만났다. 스튜디오 바주카는 CJ ENM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제작 스튜디오다.

2014년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신비아파트는 오는 16일 시즌4 방송을 앞두고 있다. 처음엔 채널 투니버스에서 TV시리즈로 방영했지만 뮤지컬 웹드라마 모바일게임 전시회 등 다양한 포맷으로 지적재산(IP)을 확장했다. 최근 ‘신비아파트 뮤지컬 시즌4: 비명동산의 초대장’의 서울 공연이 끝났다. 시즌3까지 뮤지컬의 유료 좌석 점유율은 최고 98%에 달했다.

시작은 ‘우리 아파트에 귀신이 산다’는 한 줄 기획안이었다. 석 국장은 “당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호러물은 없었다. 남들이 하지 않은 작품, 앞으로도 하지 못할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며 “아이들이 즐길만한 콘텐츠가 원치 않게 제한되는 것 같아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단 생각도 들었다”고 회상했다.

신비아파트는 주인공 하리가 신비 금비 등 도깨비들과 함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영혼의 사연을 듣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이야기다. 하리의 동생 두리를 비롯해 친구인 강림 현우 라온 등이 퇴마사로 활약한다.

사진=이한결 기자

호러물이지만 무서움을 느끼기보다 영혼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게 신비아파트가 오랫동안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받아 온 비결이다. 석 국장은 “호러 장르로 특정하고 기획했기 때문에 어린 시청자가 느낄 공포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신비 금비 등 개그 캐릭터를 적재적소에 포진시키고 각 에피소드의 결말을 감동적으로 맺어 시청자들에게 공포보다 감동이라는 잔상이 오래 가도록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신비아파트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영혼이 나온다. 제작진은 뉴스 등에서 접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사연으로 스토리를 구성해 몰입감을 높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질 뻔한 아들을 구하려다 추락해 목숨을 잃은 엄마,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쓰레기 매립장의 버려진 냉장고에 숨었다가 나오지 못해 숨진 아이, 자신을 버리고 간 부모를 기다리다가 눈 오는 추운 겨울날 세상을 떠난 아기…. 각 에피소드의 내용이 이렇다 보니 아이 옆에서 시청하던 부모도 이야기에 빠져든다. 부모 시청률도 2~3%가 나오는 이유다.

만든 사람은 어땠을까. 석 국장은 “맞벌이 부모가 출근한 뒤 아파트 옥상에서 놀다가 물탱크에 빠져 목숨을 잃은 형제의 사연이 담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감정이 이입돼 많이 울었다. 우리에겐 이런 게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라면서 “자식을 키우는 아빠로서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아이들이 힘들거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 걸 보면 한 번 더 챙기게 된다”고 말했다.

신비아파트 라이선싱 상품 등의 누적 매출액은 소비자가 기준 2000억원이 넘는다. 태국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도 지상파를 통해 방영돼 같은 시기 방영된 애니메이션 중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시즌1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도 진출했다. 일본과 싱가포르에도 올가을 시즌1이 소개된다.

석 국장은 2003년 투니버스에서 더빙PD를 맡아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했다. 해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연기를 분석해 가장 적합한 성우를 캐스팅하고 연기를 지도하면서 더빙작업을 하는 일이다. ‘명탐정 코난’ ‘개구리 중사 케로로’ ‘드래곤볼’ 등의 더빙PD로 일했다. 이후 ‘안녕 자두야’ ‘냉장고 나라 코코몽’ ‘놓지마 정신줄’ ‘파파독’ 등의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석 국장의 철학은 간단하다. ‘재미가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엔 뼈가 있었다. 석 국장은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기존 작품 중에는 사업을 위한 것이 많았다. 제작 환경이 어려워지다 보니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수익 모델부터 찾으려 한다”면서 “그렇게 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보단 사업적 콘셉트가 개입하게 된다”고 짚었다.

신비아파트는 이런 점에서 차별화된 전략을 추구한다. 석 국장은 “이야기가 재밌기 때문에 팬덤이 생기고 브랜드가 강력해지면서 뮤지컬이나 게임, 극장판, 전시회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석 국장은 창작의 영감을 다른 창작물에서 얻는 편이다. 그는 “영화 드라마 예능 뮤지컬 만화책 등 접할 수 있는 콘텐츠는 닥치는 대로 보는 편”이라며 “그 안에서 다뤄지는 세계관, 시퀀스 설정, 캐릭터 등을 면밀히 들여다본다”고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트랜스미디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석 국장은 “다른 영역, 다른 장르의 콘텐츠를 보다 보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어떨까’ 연구하게 된다”며 “예를 들어 드라마로 만들어진 영화 ‘뷰티인사이드’를 여러 번 봤는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더 환상적이고 과감한 연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tvN에서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구미호뎐’을 OTT향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신비아파트도 50분 가량의 중장편을 만들어 올해 말쯤 OTT 플랫폼을 공략할 예정이다.

애니메이션이 해외 시장에 더 많이 진출하려면 OTT 활용이 필수다. 석 국장은 “국내에 웹툰 드라마 등 좋은 원작 IP가 많기 때문에 이를 발판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OTT에 소개하는 기회가 늘어난다면 우리 애니메이션도 K브랜드를 다는 때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비아파트는 시즌7까지 구상을 끝냈다. ‘롱타임 밸류’라는 더 큰 그림도 그리고 있다. 2014년 첫 방송 당시 초등학생이던 팬들은 곧 대학생이 된다. 그들을 타깃으로 한 성인 버전의 신비아파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도 생각 중이다. 신비아파트 외에도 만들고 싶은 작품이 있다.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 감성의 애니메이션이나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카우보이 비밥’처럼 스타일리시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석 국장의 롤모델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세계적 애니메이션 명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