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민 100여명 놔둔채 야반도주하듯 철군… ‘제2 사이공’ 굴욕

입력 2021-09-01 04:02
크리스토퍼 도나휴 미 육군 82공수사단장이 30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군으로 C-17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2001년부터 시작된 아프간 전쟁은 이로써 20년 만에 끝을 맺었다. 탈레반은 정권을 재장악한 반면 야반도주하듯 떠난 미국은 위신 추락과 함께 큰 비난을 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30일 오후 11시59분(현지시간) 아스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로스 윌슨 주아프간 미국대사를 실은 마지막 C-17 수송기가 이륙했다. 탈레반 대원들은 어둠 속에서 수송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축포를 쏘며 승리를 자축했다.

미국이 아프간 공습 이후 20년 만에 현지 군대를 모두 철수하며 자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전쟁을 마감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말해주듯 아프간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탈레반은 정권을 재장악한 반면 미국은 야반도주하듯 서둘러 떠났다. 그것도 스스로 정한 31일을 하루 앞두고 철수했다. 미국의 위신은 크게 추락했다. 20년간 막대한 물자와 돈, 인력을 투입하고도 승리하지 못했고, 탈레반 전력에 대한 오판으로 ‘제2의 사이공’으로 불릴 정도로 철수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까지 빚어졌다.

30일(현지시간) 미군 항공기가 공항을 떠나는 모습.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이제 20년간의 미군 주둔이 끝났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전쟁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카리 유수프 탈레반 대변인은 “마지막 미군 병사가 카불공항을 떠났고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탈레반의 극명한 대비는 전쟁의 패배를 더 뼈아프게 드러낸다. CNN은 “아프간 철수에 따른 정치적 비난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미국이 최장기 전쟁을 끝냈지만 군 역사상 ‘엄청난 실패’ ‘완수하지 못한 약속’ ‘광란의 마지막 탈출’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베트남전 수준의 패배를 보여줬다”고 힐난했다.

아프간전에서 희생된 사람은 지난 4월 기준 약 17만명이다. 아프간 정부군 6만6000명, 탈레반 5만1000명, 아프간 민간인 4만7000명 등 현지인 피해가 대부분이다. 미국 측은 미군 2448명, 미 정부와 계약을 한 요원 3846명, 동맹군 1144명 등이 숨졌다.

탈레반 특수부대원들이 31일(현지시간) 미군이 철수한 카불 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전날 미군이 철수하면서 20년간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끝을 맺었다. 탈레반은 즉각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AFP연합뉴스

이런 악몽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아프간에서 자국민을 모두 탈출시키는 데 실패했다. 케네스 매킨지 미 중부사령관은 “우리가 빼내고 싶었던 모든 사람을 빼내지 못했다”며 “열흘 더 머물렀더라도 모든 사람을 내보내지 못했을 것이고 여전히 실망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아프간에 남은 미국인 규모에 대해 “200명은 안 되고 100명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폭스뉴스는 “바이든은 모든 미국인이 대피할 때까지 아프간에 ‘남아 있겠다’던 약속을 어겼다”고 꼬집었다.

미국에 협조했거나 미국 지원을 받은 현지인을 포함하면 수천명이 탈레반 보복을 우려하며 현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 미 언론은 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사설에서 이를 “도덕적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떠난 아프간에서 이슬람국가(IS)가 다시 세력 확장에 나설 가능성도 커졌다. 지난 26일 카불 공항 인근에선 IS-K(IS 호라산)의 자살폭탄 테러로 13명의 미군과 170여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비판도 받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동맹국 사이에선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온다. 유럽 내부에선 미국에 의존적인 동맹 전략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동맹 재건을 모토로 내세웠던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아프간에 자행되는 여성과 아동인권 침해 책임 역시 떠안게 됐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강창욱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