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이하 학점제)는 도입될 수 있을까. 학점제 적용 첫 세대는 2025년 3월 고등학생이 되는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다. 이에 앞서 현재 중2가 고교에 올라가는 2023년부터 일부 학점제 요소를 도입해 학교 현장이 대비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고교생이 대학생처럼 자신의 진로에 맞는 수업을 중심으로 학점을 누적하고 졸업하는 학점제는 고교 교육의 혁신을 불러올 전망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중에서도 현재 제도를 추진하고 있는 교육부 자체가 걸림돌이란 평가가 나온다.
교육 철학 없는 교육부
학점제는 교사 채용 확대부터 교육 시설 재구조화까지 국가적 역량을 투입해야 가능한 제도다. 본격적인 투자는 다음 정부에서 이뤄진다. 차기 대권을 거머쥔 쪽이 제도를 바라보는 태도에 학점제 운명이 달렸다. 교육부 사람들은 차기 대선 주자들의 교육 공약이라도 봐야 이 제도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차기 정권의 불확실한 입장보다 학점제 도입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드는 건 ‘교육 철학 없는 교육부’다. “적어도 고교 교육은 이래야 한다”는 교육부 내부 논리나 철학, 비전이 존재했다면 정권 교체 때마다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하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가 많다. 교육부의 논리가 학부모를 비롯해 교육계의 호응을 얻었다면 정치권력이 함부로 흔들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교육부에 몸 담았던 교육계 관계자는 3일 “교육부의 유일한 교육 철학이라면 ‘정권 입맛대로’였다. 오죽했으면 국가교육위까지 등장했겠는가”라며 혀를 찼다.
특히 대입정책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달 23일 ‘고교학점제 단계적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학점제가 전면 도입되는 2025년까지의 연도별 정부 추진 계획이 담겼다. 학점제용 대입제도에 대한 언급도 있었는데 “학생 진로와 적성을 존중”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력 함양” 등을 강조했다. 적어도 표준화된 평가 즉 수능 점수로 줄 세우는 방식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틀 뒤인 25일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주재로 이뤄진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나온 ‘공정성 향상을 위한 사회정책 보완 방안 점검결과 및 향후계획’에서는 수능 위주의 정시비중 확대를 통해 공정한 기회가 늘었다고 자평했다. 교육부의 공정성 향상 추진 실적을 나열하면서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의 첫 부분에 정시 확대를 내세웠다.
교육부 관계자는 ‘정시가 공정하다는 게 공식 입장인가’ ‘향후 대입 개편에서 수능 비중을 늘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미래형 대입제도는 2024년 발표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교육부에서 학점제를 추진 중인 학교혁신지원실, 대입제도를 관장하는 고등교육정책실, 사회관계장관회의를 담당하는 사회정책협력관이 따로 노는 형국이다.
“어려운 결정은 후임자 몫”
교육부가 대입정책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내부 교통정리조차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교사들 사이에선 학점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달 11일 발표한 ‘고교학점제 도입에 대한 학생, 학부모, 교사의 인식 조사’를 보면 학점제 도입 시 우려되는 사항에 대해 교사들은 ‘학교 교육 방식과 대입제도 불일치’를 가장 많이(38.5%) 꼽았다. 두 번째로 많은 ‘선택 중심 교육으로 인한 보편교육 위축’(17.5%)보다 배 이상 많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대입 제도와의 부조화를 학점제 반대의 주된 이유로 꼽고 있다.
교육부로선 암초를 만난 셈인데, 이는 자초한 측면이 크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었던 학점제와 수능 절대평가는 원래 한 세트다. 학점제를 도입하려면 수능 영향력을 함께 줄여야 한다. 수능이 강하면 학생 선택권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학점 따는 걸 포기하고 수능에 집중하는 학생을 막기도 어렵다. 하지만 수능 절대평가 공약을 폐기하고 ‘정시 비중 30% 의무화’란 이도저도 아닌 결론을 내놨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서울 16개 대학의 정시 비중은 40% 이상으로 높아졌다. 수시에서 정시로 이월하는 인원까지 더하면 절반가량 정시로 선발하도록 ‘역주행’했다.
교육부는 정시 확대에 공개 반대했었다. 당시 교육부 고위 관계자는 “직을 걸고 정시 확대는 없다”고 단언했다. 유 부총리도 반대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정시 확대를 공언한 뒤 교육부 입장이 “정시가 더 공정하다”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학점제와 대입제도의 부조화에는 입을 닫고 2024년 2월로 어려운 결정을 미뤘다. 교사들이 교육부와 학점제에 신뢰를 거둔 것이 이유가 없지 않다는 평가다.
조만간 학점제 추진 체계도 공중에 뜨게 된다. 차기 정부가 내년 5월에 출범하고 두 달 뒤 국가교육위가 등장한다. 대입제도와 국가교육과정, 교원 정책 등 학점제 추진을 위한 핵심 업무가 국가교육위로 넘어간다. 교육부는 대규모 조직 개편과 인사 이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점제는 담당자들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담당자들은 “학생 수가 너무 줄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국가적으로 소중한 인재일 것이다. 이들을 미래 인재로 키우려면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고 결국 학점제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교육부 정서는 “우리 손 떠난 일 아닐까”로 읽힌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