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년반 만에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한 것을 두고 ‘핵카드’를 다시 꺼내 대미 압박을 강화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해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제재완화 등을 받아내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우리 정부가 북측의 원자로 재가동 사실을 알고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조기 재가동을 위해 남북 통신선 복원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7일(현지시간) 발간한 북핵 관련 9월 연례 이사회 보고서에서 영변 핵시설 내 5㎿ 원자로와 관련해 “2021년 7월 초부터 냉각수 방출을 포함해 원자로 가동과 일치하는 정황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2018년 12월 이후 5㎿ 원자로가 가동됐다는 정황은 전혀 없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IAEA는 지난 2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 5㎿ 원자로 근처에 있는 폐연료봉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연구소가 가동된 정황을 들며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가능성도 시사했다. 5개월이라는 가동 기간은 과거 북한이 5㎿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데 걸린다고 밝힌 기간과 일치한다.
IAEA는 특히 “북한의 핵 활동은 계속 심각한 우려를 부르는 원인”이라며 “더 나아가 5㎿ 원자로와 방사화학연구소가 가동된다는 새로운 정황들은 심각한 골칫거리”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명백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원자로 재가동이 대미 압박용이라는 데 무게를 뒀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30일 “북한은 그동안 탐지가 가능한 재처리 시설을 통한 플루토늄보다는 고농축 우라늄 가동시설을 통해 핵물질을 생산해왔다”며 “이런 이유로 실질적인 핵물질 생산보다는 영변 핵시설이 여전히 유효한 대미 협상카드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 대신 5건의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지만, 미국이 영변 외에 ‘플러스 알파’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 이번 영변 원자로 재가동이 미국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란 핵합의 복원 협상 교착 등에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새로운 난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는 “우리는 비핵화와 관련한 모든 이슈와 보고된 활동을 다룰 수 있도록 북한과의 대화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원자로가 재가동된 시점을 전후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친서로 남북 통신선 복원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무리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핵 고도화를 알고 있었음에도 정부는 통신선 복원 홍보는 물론 한·미 연합훈련 중단까지 얘기했다”며 “정부가 (정보를) 선택적으로 오용하는 것은 아닌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영변 원자로 가동은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합의 위반으로도 볼 수 있다”며 “북한 문제의 본질은 북핵 개발인데, 정부가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건 비판받을 만한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김영선 기자,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