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격상되면서 반도체 기업 간 인수합병(M&A)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가 특정 국가로 쏠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가 M&A를 승인하지 않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제재로 ‘반도체 굴기’가 사실상 꺾인 중국이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저장장치 전문업에 웨스턴디지털(WD)이 일본 메모리 업체 키옥시아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인수 대금은 약 200억 달러 이상으로 예상되며, 이르면 9월 중순 협상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키옥시아는 과거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에서 분사한 회사로 낸드 플래시를 전문으로 한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삼성전자(33.5%)에 이어 2위(18.7%)를 달리고 있다. 이번 인수가 성사되면 3위 WD(14.7%)의 점유율을 더해 1위를 넘볼 수 있다. 낸드 플래시 업계 재편이 일어날 수 있는 대형 M&A다.
관건은 이해 당사자인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거래를 승인할지 여부다. 한때 메모리 반도체로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은 키옥시아 마저 다른 나라에 팔리면 반도체에서 설 땅이 사라진다. WSJ은 “키옥시아의 중요성, 핵심 기술의 소유권 이전에 대한 정치적 민감성 등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반도체 시장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중국과 경쟁을 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인수를 환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중국이다. 중국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인수 시도를 무산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18년 퀄컴이 네덜란드 자동차 반도체 업체 NXP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중국은 인수 심사를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결국 M&A를 무산시켰다. 2019년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 어플라이머트리얼즈가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에 대한 M&A를 시도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중국이 제동을 걸었다.
현재 중국은 미국 반도체 업체 AMD의 자일링스 인수, SK하이닉스의 인텔 메모리 사업부 인수 심사를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총 8개국에서 인수 심사를 받았는데 7개국은 통과했고 중국만 남은 상태다. 업계에서는 AMD와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중국이 승인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미국 그래픽카드 업체 엔비디아가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 ARM을 인수하려는 시도 역시 중국과 영국에 의해 미래가 불투명하다. 영국 반독점 당국인 경쟁시장청(CMA)는 해당 인수 건이 시장 경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2단계 심층 조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돌아온 삼성전자도 반도체 분야에서 M&A를 추진 중이지만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1위인 삼성전자가 M&A를 통해 다른 분야까지 영역을 확대하려는 걸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