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교회에 필요한 건 대부흥 일으킨 ‘하디의 회개’

입력 2021-08-27 03:03
이철 기감 감독회장이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에서 드린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 출판 감사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하리영 박사가 웃으면 조선에 3년 풍년이 든다’고 신학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선교사역에 관한 한 유약한 감상을 용납하지 않는 냉엄 그 자체였지만, 속은 부드럽고 따스하며 깊은 영성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냉철한 감리교 신학자였습니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종교교회(최이우 목사)에서 회고한 로버트 A 하디(하리영·1865~1949) 선교사의 성품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는 이날 종교교회 나원용홀에서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밀알북스) 출판 감사예배를 드렸다.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이 교수가 무려 1183쪽에 걸쳐 저술한 대작이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토론토의과대학 1학년 때 ‘한국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선배의 호소를 듣고 해외 선교를 결심한다. 1890년 내한해 서울 부산 원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로 소속을 옮겨 개성 서울 원산에서 사역했다. 1900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다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연합 사경회를 인도하며 ‘성령세례’와 회심을 체험한다. 당시 하디 선교사는 선교보고에 이렇게 썼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국민일보DB

“성령께서는 내가 선교사로 대부분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나의 실패와 그 원인을 밝히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창피한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지난 수년간 한국 교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믿음의 확증을 열매로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행위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회심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곧이어 맞이한 주일예배 때 토착 교인들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오만과 굳은 마음, 불신을 자백했다. 선교비 유용까지 털어놨다. 그리곤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선교사를 완벽한 인물로 보던 한국 성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회개와 자복과 회심과 중생의 체험을 면전에서 목격했다. 회개는 들불처럼 퍼져갔다. 이것이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발화점이며 길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시작점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7년 협성신학교(현 감신대)의 교수가 되어 성서신학을 강의했고 1923년엔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과 기독신보 사장으로 언론사역에 종사하며 60여권의 저술과 200여편의 논문을 남겼다. 의료선교로 시작해 복음전도 교회목회 부흥운동 신학교육 문서선교 농촌운동에 초교파연합운동까지 45년간 한국에서 사역했다.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워진 간성교회 강릉중앙교회 광희문교회 석교교회 수표교교회 양양교회 종교교회는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감 본부 및 감신대와 함께 이번 평전 발간을 주도했다. 이철 기감 감독회장은 “하디 선교사의 회심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며 “2023년 원산 부흥운동 120주년 성회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