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안은미는 단 한 번 만나도 잊기 어렵다. 트레이드마크인 빡빡머리와 알록달록 무늬의 오색찬란한 의상은 그가 어디에 있든 존재감을 발산한다. 춤도 마찬가지다. 그는 관습의 틀을 깨는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춤으로 한국 현대무용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했다. 할머니들의 막춤으로 유명한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전 세계 50개 안팎의 극장 및 축제의 초청을 받는 등 그의 작품은 한국을 넘어 해외 관객까지 사로잡았다. 현대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 시립극장(테아트르 드 라빌)은 2018년 한국 출신 예술가로는 처음 그를 상주예술가로 위촉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안은미컴퍼니의 해외 투어도 취소 혹은 연기됐다. 예상하지 못한 타격이었지만 그는 국내에서 부지런히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신작도 2편이나 올렸다. 지금까지 만든 150여편 가운데 최근 국내외에서 러브콜을 받은 4편을 잇달아 선보이는 ‘안은미컴퍼니 4괘-용 이름 거시기 조상님’도 기획했다. 안은미컴퍼니가 상주단체로 있는 영등포아트홀에서 ‘드래곤즈’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Let Me Change Your Name) ‘거시기 모놀로그’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28~29일과 다음 달 4~5일 차례대로 무대에 오른다. 안은미컴퍼니 페스티벌을 표방한 4괘 공연은 아카이빙을 위한 영상 촬영도 함께 이뤄진다.
“팬데믹 시대에 춤은 공동체의 가치 알려줘”
“코로나로 힘들다고 가만히 있는 건 작가가 아니죠. 예술이 고단한 작업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춤추는 게 오히려 휴식이자 활력을 줘요. 팬데믹을 해결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잖아요. 협업으로 이뤄지는 춤은 공동체의 가치를 새삼 알려준다고 봐요.”
서울 보광동 안은미컴퍼니 사무실에서 지난 18일 만난 그는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이번 공연을 설명했다. 첫 번째 작품인 ‘드래곤즈’는 가장 최신작으로 모바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2000년대에 아시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Z세대’ 무용수들이 함께한 작품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올해 초연 당시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대만에서 뽑은 5명의 무용수는 한국에 올 수 없게 되자 화상회의프로그램 ‘줌’(zoom)으로 연습한 뒤 실제 공연에 홀로그램으로 출연했다.
“줌으로 연습을 지도하고 인스타그램에 서로의 연습 영상을 공유하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드래곤즈’의 주제와 작업방식에 대한 해외 무용계의 관심이 높아서 다음 달 중순부터 유럽 투어가 잡혔습니다. 안은미컴퍼니는 코로나 이후 해외 투어에 나서는 첫 한국 예술단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4괘의 두 번째 작품인 ‘렛 미 체인지 유어 네임’은 안은미가 2005년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지금도 꾸준히 해외에서 초청받고 있다. 세트 없이 무용수의 몸짓으로만 이뤄지며,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육체가 충돌하고 어우러지는 화합을 그렸다. 원래 한국 무용수와 서양 무용수가 출연했지만, 이번에는 안은미컴퍼니 단원들이 재연한다. 안은미는 “현재 해외에서 초청받는 내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됐지만 꾸준하다”고 설명했다.
4괘 가운데 세 번째로 관객과 만나는 작품은 2019년 초연된 ‘거시기 모놀로그’. 이 작품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감각으로만 남아있는 할머니들의 첫 경험을 소재로 했다. 60~90대 여성들의 첫 경험 고백을 무용수들의 몸짓과 함께 풀어낸다. “우리 할머니들의 몸에는 사회적 터부가 각인돼 있는데, 성(性)이 대표적입니다.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성에 대해 억압받아왔잖아요. 할머니들의 경우 너무나 강렬하지만 힘들었던 첫 경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세요. ‘거시기 모놀로그’는 성에 대한 한국의 어두운 인식을 다룸으로써 ‘몸의 잔혹사’를 끊고 싶었습니다.”
안은미의 무용 인류학 시리즈는 계속된다
4괘의 피날레는 안은미의 ‘무용 인류학 시리즈’의 출발점이자 국내외에서 인기 있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가 맡았다. 안은미컴퍼니가 2011년 초연한 이 작품은 전국을 돌며 만난 할머니들의 춤을 직접 기록하고 그 몸짓을 공연에 녹여냈다. 할머니들의 몸은 주름지고 구부정해졌지만 춤에는 삶의 에너지가 있었다. 이 작품은 2014년 프랑스 파리 여름축제에 공식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각종 페스티벌과 극장에 앞다퉈 초대됐다.
“늘 춤이란 무엇인지, 우리 시대의 춤을 어떻게 정의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그런데, 저희 엄마를 비롯해 할머니 세대들은 춤을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춤을 잘 추세요. 동작이 대부분 비슷한데요. 저는 20세기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겪은 이들의 몸에 스며든 춤이 또 다른 의미의 민속무용이라고 봐요.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이 세대의 춤을 기록하는 게 중요합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이후 안은미는 춤을 인류학적으로 접근하고 안무하는 스타일을 본격화했다. 청소년 및 중년 남성을 각각 리서치하고 만든 ‘사심 없는 땐스’ ‘아저씨의 무책임한 땐스’, 시각장애인과 왜소증 장애인과 함께 각각 작업한 ‘안심땐스’ ‘대심땐스’, 북한춤 공부를 통해 만들어진 ‘안은미의 북한춤’ 등이 나왔다. 이들 작품은 처음엔 일반인이 춤을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치유하는 ‘커뮤니티 댄스’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은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반인을 커뮤니티에서 끌어내 자기 몸의 주권을 새롭게 재확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댄스’가 아니다”라며 “춤을 사회로 돌려보내는 내 작업은 ‘퍼블릭 아트’라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안은미는 2019년 데뷔 3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안은미래’전을 열었다. 미술관에서 이례적으로 개최된 안무가의 개인전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전시는 자료 정리 차원의 단순 회고전 대신 안은미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소들을 통해 미래를 탐구하는 새로운 장으로 기획됐다. 안은미는 이날 인터뷰에서도 ‘미래’를 강조했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 배울 것이 많아요. 돈이 없는 게 좀 문제이긴 하지만 대학 시절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감수하기로 한 거니까 괜찮아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