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아프간 지도층 그리고 인권

입력 2021-08-25 04:03

광복절이었던 지난 15일 오전만 해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후 5시쯤부터 탈레반이 카불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나왔고, 급기야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실 우리뿐 아니라 미국도 탈레반의 속전속결 정권 재장악을 예측하지 못했다. 미국 행정부 당국자는 불과 나흘 전인 11일 워싱턴포스트에 “90일 이내에 수도인 카불이 함락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자마자 백기를 들었다. 대통령 사퇴, 과도정부 수반 임명 등이 단 몇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심지어 탈레반은 미군 주력 헬기인 블랙호크에 깃발을 꽂은 사진을 트위터에 뿌리며 승리를 과시했다.

이렇게 아프간이 갑자기 무너진 데에는 지도층의 무능이 가장 크다. 국민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에 아직 입성도 하지 않은 시각 현금을 차량 4대에 가득 싣고 조국을 떠났다. 당시 돈을 헬기에 실으려고 했지만 전부 싣지는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남겨뒀다는 전언도 나왔다. 대통령이 떠난 아프간에서 국민들은 아비규환 속에 있다. 카불 공항에선 총소리와 함께 아이를 들쳐업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공항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두 살배기 아기까지 몰려든 인파에 압사당하는 비극도 펼쳐졌다.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로 내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아프간 정부군은 30만명으로 탈레반 반군(7만명)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상당수 군경 간부들이 급료를 가로채기 위해 허위로 명부에 기재한 ‘유령군인’이었다.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큰 바위 얼굴’에는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세 부류 사람이 나온다. 탐욕스러운 자, 지혜가 없는 자, 그리고 겉만 번지르르 하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다. 아프간 대통령은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겠다. 무릇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국민만 모진 고생을 겪는 건 동서고금의 이치다. 46년 전 미국의 든든한 원조를 받았던 월남은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로 패망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정권 다툼과 고종의 무능함, 매국노의 발호로 대한제국이 무너졌다.

아프간 사태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은 인권이다. 탈레반은 극악무도한 인권 유린으로 악명 높다. 특히 여성과 아동 인권에 큰 제약을 가한 단체다. 실제 탈레반은 1990년대 극단적인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적용했다. 당시 음악, TV 등이 금지됐고 도둑의 손을 자르거나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돌로 쳐 죽게 하는 가혹한 벌도 허용됐다. 여성들은 교육과 직업이 금지됐고, 공공장소에선 부르카(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가리는 복장)를 착용해야 했다. 성폭력과 강제 결혼이 횡행했다. 탈레반은 카불 입성 이후 계속해서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했지만 기만전술일 가능성이 크다. 무릇 한 사람이나 단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는 일은 매우 힘든 법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 테러를 당했다거나, 일부 방송국이나 직장에선 이미 여성이 정직을 당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탈레반 인권 유린과 관련해 일각에선 ‘이슬람 고유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 ‘내정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침묵하는 게 맞는다는 의견도 나온다. 반미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탈레반의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탈레반 집권은 차치하더라도 인권에 대해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핍박 받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인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모규엽 국제부장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