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정권의 대표적 공안 사건인 ‘동백림 사건’을 조작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8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민주화 세력과 접촉해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려 했다는 사실이 최근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의 책을 통해 공개됐다.
이 이사장은 68~82년 독일과 스위스, 미국, 일본을 오가며 펼쳤던 해외 민주화 운동사를 담은 ‘해외에서 함께한 민주화 운동’(동연)을 출판했다. 이 이사장은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였던 ‘기독자민주동지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
기독교 민주화 운동은 69년 3선 개헌 이후 시작됐으며 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독자민주동지회가 결성된 이후 구체화했다. 두 단체에는 김재준 강문규 김관석 정성환 이승만 오재식 지명관 송두율 윤이상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목회자와 교수 등이 대거 참여했다.
김 전 부장이 접촉한 단체는 미국의 민주주의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연합운동체’(UM)였다. 이 이사장은 23일 서울 종로구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해외 민주 인사들을 누구보다 잘 알던 김 전 부장이 그들을 통해 박정희정권을 압박하려 했던 것 같고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책에는 김 전 부장과 만났던 민주 인사들의 편지가 실렸다. “김 전 부장을 만나 박 정권의 내막을 듣고 있다. 앞으로 민주화 운동을 돕고 싶다고 했지만 (그의 제안을) 경솔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림순만 미국 윌리엄페터슨대 교수) “김 전 부장이 ‘민주 사회주의’를 주장해 놀랐다. 그 사람이 가진 정보는 역사를 바로 쓰는 데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장혜원 컬럼비아대 교수) “그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케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해외 민주화 운동 지원 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기증받는 걸 교섭하려 한다.”(선우학원 센트럴감리교대 교수)
하지만 이 모든 논의는 이듬해 김 전 부장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된 뒤 실종되면서 무산됐다.
책에는 정권의 눈을 피해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내 민주주의 세력과 세계교회, 외신기자를 연결했던 기독교 활동가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이 이사장은 한국어와 영어, 독어로 기록한 수천건의 회의록과 500여통의 편지를 근거로 책을 썼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던 시인 김지하와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을 위한 전 세계 여론전을 비롯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해직 기자들의 생활비 일부를 수년 동안 지원하는 등 민주주의의 시간을 앞당기는 데 헌신했다.
이 이사장은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설립했던 그 마음으로 운동에 참여했고 망명을 각오했다”며 “일본의 ‘세카이’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긴 세월 한국의 민주주의 투쟁사를 쓴 지명관 선생도 이 단체가 지원했다”고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 역할은 이렇게 끝이 났다”며 “다음세대 기독교인들이 문명의 전환기에 적응하며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교회의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