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한국의 민주화 지원하려 했다”

입력 2021-08-24 03:02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이 23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군사 독재 시절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해외 민주화 운동 단체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박정희정권의 대표적 공안 사건인 ‘동백림 사건’을 조작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8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민주화 세력과 접촉해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려 했다는 사실이 최근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의 책을 통해 공개됐다.

이 이사장은 68~82년 독일과 스위스, 미국, 일본을 오가며 펼쳤던 해외 민주화 운동사를 담은 ‘해외에서 함께한 민주화 운동’(동연)을 출판했다. 이 이사장은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였던 ‘기독자민주동지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

기독교 민주화 운동은 69년 3선 개헌 이후 시작됐으며 7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독자민주동지회가 결성된 이후 구체화했다. 두 단체에는 김재준 강문규 김관석 정성환 이승만 오재식 지명관 송두율 윤이상 등 해외에서 활동하던 목회자와 교수 등이 대거 참여했다.

김 전 부장이 접촉한 단체는 미국의 민주주의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연합운동체’(UM)였다. 이 이사장은 23일 서울 종로구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해외 민주 인사들을 누구보다 잘 알던 김 전 부장이 그들을 통해 박정희정권을 압박하려 했던 것 같고 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책에는 김 전 부장과 만났던 민주 인사들의 편지가 실렸다. “김 전 부장을 만나 박 정권의 내막을 듣고 있다. 앞으로 민주화 운동을 돕고 싶다고 했지만 (그의 제안을) 경솔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림순만 미국 윌리엄페터슨대 교수) “김 전 부장이 ‘민주 사회주의’를 주장해 놀랐다. 그 사람이 가진 정보는 역사를 바로 쓰는 데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장혜원 컬럼비아대 교수) “그가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케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해외 민주화 운동 지원 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기증받는 걸 교섭하려 한다.”(선우학원 센트럴감리교대 교수)

하지만 이 모든 논의는 이듬해 김 전 부장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된 뒤 실종되면서 무산됐다.

책에는 정권의 눈을 피해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내 민주주의 세력과 세계교회, 외신기자를 연결했던 기독교 활동가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다. 이 이사장은 한국어와 영어, 독어로 기록한 수천건의 회의록과 500여통의 편지를 근거로 책을 썼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던 시인 김지하와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을 위한 전 세계 여론전을 비롯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해직 기자들의 생활비 일부를 수년 동안 지원하는 등 민주주의의 시간을 앞당기는 데 헌신했다.

이 이사장은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설립했던 그 마음으로 운동에 참여했고 망명을 각오했다”며 “일본의 ‘세카이’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긴 세월 한국의 민주주의 투쟁사를 쓴 지명관 선생도 이 단체가 지원했다”고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 역할은 이렇게 끝이 났다”며 “다음세대 기독교인들이 문명의 전환기에 적응하며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데 힘쓰고 교회의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