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신간을 보다가 사지 않을 수 없는 책을 만나곤 한다. 몇 쪽을 잠깐 훑어볼 따름인데, 문장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가 마음에 훅 들어오는 경우다. 한 분야에서 긴 시간을 살아낸 이의 첫 책인 경우가 그렇다. 마지막 책이 될 수도 있기에 첫 책엔 후속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밀도가 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아프고 슬플 수도 있구나’, ‘이런 사람들과 꿈꾸고 도전하며 인생의 시간을 보냈구나’, ‘세상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읽다 보면 그렇게 걸어온 길과 축적된 지혜에 경외감이 들기도 하고, 동시대를 살면서도 그렇게 불의한 일이 있었는지 모른 채 살았던 무지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읽기만 그런 게 아니다. 듣기도 그렇다. 누군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을 수만 있다면, 그 인생에 담긴 광활한 우주와 마주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다루는 영화를 만들어 국내에도 팬이 많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경청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눈앞의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상대를 덮어버리지 않는지,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부분에 필요한 코멘트만 잘라내는 게 아닌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극영화를 찍을 때, 어린 배우에게조차 자신의 촬영 원칙을 따르게 하기보다 아이의 적성에 맞게끔 방식을 바꿔나간다고 한다(책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중).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단역조차도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다. 평생 물고기만 잡던 어부를 만나든, 부정하다 여겨 사람들이 말도 건네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든, 과다한 세금을 걷어 동족에게 미움받던 세리를 만나든 예수님 자신이 하시고 싶은 말을 먼저 하지 않고, 그의 형편을 살펴보시고 그들이 말할 기회를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변화된 뒤의 모습은 모두 다르면서도 같다. 다르다는 건 각자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했다는 뜻이고, 같다는 것은 결국 구원이라는 큰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됐다는 뜻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유형의 인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각자 살아온 배경과 경험, 아픔과 열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을 ‘나’라는 울타리 안에만 갇혀 살지 않도록 만든다. 시냇물이 강물에 합류하고, 마침내 바다로 다다르듯 우리의 이야기는 교회라는 강물을 만나 마침내 구원의 바다로 향한다.
코로나19가 교회에 던진 가장 큰 문제는 지류가 강물로 합류하는 지점, 즉 개인의 이야기가 교회 공동체와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 끊어졌다는 거다. 코로나19를 장기간 겪으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변해 버렸다. 남과 나를 분리해 보호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동체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콘텐츠를 소비할 땐 흥미와 재미에만 몰두하는 감각이 과도하게 늘어났다.
정부가 확진자 억제보다는 위중증 환자 관리에 집중하는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을 논의하는 시점에 다다른 만큼, 교회도 목회의 방향 전환이 요구된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끊어진 지점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가 여전히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숫자의 복원이 아닌 이야기의 복원이 필요하다.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셨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작은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성현 목사(필름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