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심야 통화에서 엿본 안철수 생각

입력 2021-08-20 04:05

국민의힘과의 합당이 무산된 배경을 듣고 싶어 18일 밤늦은 시각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통화를 했다. 그런데 안 대표는 합당 얘기 전에 지난 1~2년 사이에 정말 충격받은 일이 있었다면서 그 얘길 먼저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일은 모더나와 화이자의 mRNA 방식 코로나19 백신 개발이라고 했다. mRNA는 이전에도 실험실에서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불안정해 금방 부서졌다. 그런데 반도체 기술자들이 이 얘길 듣고선 나노 단위 반도체 개발에 쓰이는 기법을 활용해 부서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지방질로 mRNA를 감싸는 방식이었고 이를 통해 안정적인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안 대표는 백신 개발에 반도체 기술이 융합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런데 그를 더 놀라게 한 건 미국 정부였다고 한다. 미 정부는 mRNA 백신의 성공 가능성을 내다보고 막대한 초기 개발비 투자는 물론, 임상 1단계 때부터 이런 종류의 백신이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규제를 모조리 없애는 작업에 착수했다. 안 대표는 “정부가 백신 개발에 고속도로를 깔아준 것”이라고 비유했다. 그렇게 해서 통상 5~10년 걸리는 백신 개발을 1년도 안 돼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앞으로는 국가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 과학기술 패권 전쟁을 벌여야 하고 그게 미래를 좌우한다”면서 “반도체 웨이퍼를 든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자국에 유리하도록 테크 기업 통제에 나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표적이다”고 했다. 이어 “이런 문명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우리가 대선을 치르게 된 건 행운이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그런 미래비전을 토론할 기회인 대선에서 쥴리, 바지, 녹음파일, 녹취록 얘기만 나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시대가 달라져 대통령이 기술을 다 알진 못해도 글로벌 기술 트렌드와 경제 여파에 대해선 알아야 하고, 전문가들이 너무 많아 누가 진짜인지 골라낼 수도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안 대표는 지금 중도층은 과학기술 패권을 비롯해 미래 문제들에 누가 더 잘 대처할지, 그래서 누가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 세력인지를 관망하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그게 요즘 다수 중도층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나부터 중도여서 잘 안다”면서 “정치하기 전에도 사람 능력을 보고 여당, 야당을 번갈아 찍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국민의힘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중도층을 더 끌어안는 방식으로 합당해야 하는데 단순히 여의도에서 당 이름(국민의당) 하나 지우는 합당만 하자고 하니 안 하게 됐다”고 무산 배경을 설명했다. 당원들은 동의하냐고 물었더니 “당원 중 합당 찬성파가 3분의 2였는데 합당 과정을 지켜보다 80~90%가 반대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의 악화된 관계가 영향을 미쳤냐는 질문엔 “서운한 일도 있었지만 사업할 때부터 중요한 결정을 할 땐 사감에 휘둘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향후 행보에 대해선 당원들과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다만 여야 어느 쪽이 미래 문제를 잘 다룰 것 같냐고 했더니 “지금 여당으로는 안 되지 않겠냐”면서도 “국민의힘도 자질은 있지만 준비가 안 돼 있거나 4차 산업혁명 시대인데 여전히 70~80년대 사고를 가진 이가 있어서 걱정이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안 대표가 대권 욕심은 상당 부분 내려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합당이 무산된 것도 본인 대권과는 무관했으리라 판단된다. 다만 대선에는 출마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해서 TV토론이나 정견 발표 때 본인이 미래 화두를 적극 제시하고, 그 문제가 대선에서 진지하게 다뤄지도록 일종의 도선사(導船士)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의중이 읽혔다. 그가 향후 대선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할까. 통화에선 그렇게 하리란 느낌을 받았다. 다만 현재로선 여당보다는 국민의힘 쪽에 압도적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다. 전체 유권자에서 중도층은 40% 안팎으로 추산된다. 안 대표가 2017년 대선 때 21%를 득표했는데, 그간 사정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출마를 한다면 캐스팅보터 역할은 충분히 해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그가 대선에 나가 미래지향적 비전을 제시한다면 다른 후보들의 자질을 높이는 데 있어서나,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도 분명히 긍정적 효과가 있으리라 본다. ‘안철수의 메기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