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가을에는 시를 읽게 하소서

입력 2021-08-19 03:05

아침과 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서늘해졌다. 무더위에 지쳤던 몸과 마음을 위로하듯 시원한 바람이 부드러이 얼굴을 스치자,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가을 정취에 대한 감각이 깨어난다. 일 년에 네 번 계절의 순환이 일어나지만 유독 여름과 가을이 교차할 때만 느껴지는 청명함이 있다. 가을이 다가올 때 순간순간 마음에서 피어나는 순수하기까지 한 감정은 기도할 때 내적으로 느끼는 경건과도 유사한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김현승 시인의 대표작 ‘가을의 기도’는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간결한 시어를 통해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절대자를 향한 모호한 갈망마저 청아한 목소리를 얻는다. 시인은 내적 성찰을 일으키는 신비한 힘이 특별히 가을과 결부되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 눈들이 그렇게도 맑아지는 지금은 가을입니다. 가을은 맑은 눈을 통하여 다시금 인생을 바라보고 문학을 통하여 씌어진 모든 세상의 진리를 찾아보게 하는 이해의 시간입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가을은 세상을 맑게 접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베풀어진 소중한 시간의 선물이다. 이렇게 인생을 시적으로 바라보고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예술적 기교일지도 모른다. 19세기 영국의 신학자 존 헨리 뉴먼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물들을 시적으로 보는 것은 의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신앙의 빛깔을 입히고, 모든 사건에서 신적인 의미를 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시적인 표현은 일상적 경험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실재의 참모습을 맛볼 공간을 언어에 마련해 준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물리적 세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신비의 현존을 지각하고 설명하게 해줄 상상력의 자리를 우리 삶에 마련한다. 신약성경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단서’라며 신앙의 시적 본질을 풍미 있게 표현해주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에 신앙의 빛깔을 입히는 능력을 갖춘 특별한 존재라면, 기독교적 덕목도 단순히 합리적이거나 도덕주의적일 수만은 없다. 뉴먼에 따르면, 평범한 사건에서도 신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명령받은 존재인 만큼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그 자체로만 보는 사람과는 차별화된 ‘시적인’ 덕목과 감정을 지닌다. 폭력과 경쟁이 사회를 끌어가고, 능력과 성취가 삶을 재단하는 현실이지만, 시적 정서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온순함과 부드러움, 공감, 자족, 겸손”이라는 비현실적 덕목에 더 큰 희망을 걸고 살 정도로 자유롭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면, 시적인 것이 말라비틀어지기 쉬운 환경이 곳곳에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스마트폰 앱 덕분에 누구나 자기 얼굴을 원하는 대로 보정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반복해서 보면서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을 자신에게 강요한다. SNS에 자기 일상을 매력적으로 편집해 수시로 공개하는 것도 많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외모 중심 문화에 파묻혀 있다 보니, 보이는 것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표현하는 능력도 전체적으로 퇴화하고 있다.

예전부터 신앙은 본성상 시적이었지만, 이 단순한 진실을 재발견하는 것이 오늘날 더욱 중요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능력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시적인 것의 상실은 신앙의 위기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시인의 말대로 가을이 우리 눈을 맑게 해준다면, 시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일상을 신적인 빛깔로 입혀내는 특별한 기회로 이번 가을을 보내면 어떨까.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만이 아니라 ‘가을에는 시를 읽게 하소서’라는 간구도 해 보는 멋들어진 가을을 맞이하기를 기대한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