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사이공’된 아프간 카불공항, 시민·외국인 필사의 탈출

입력 2021-08-17 04:02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16일(현지시간) 카불 공항에서 아프간을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공기에 올라타려 하고 있다.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뒤 공항에는 날이 밝기도 전에 공포에 질린 아프간 민간인과 외국인 수천명이 몰려들어 공항 운영 자체가 마비됐다. 트위터 영상 캡처

‘탕. 탕.’ 산발적인 총성이 고막을 울린다. 아이를 들쳐업은 사람들이 겁에 질린채 비명을 지르며 공항을 향해 내달린다. 절박한 사람들은 활주로를 점거하고 항공기를 둘러싼다. 16일 한 트위터에 올라온 동영상엔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극심한 혼란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순식간에 아프간을 장악하면서 현지 주민들은 패닉(공포)에 빠졌다. 특히 카불 공항은 필사의 탈출을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발포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카불은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탈출’을 연상케 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이날 날이 밝기도 전에 수천명의 주민이 몰려들어 공항이 마비됐다. 갈수록 공항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렸고, 주민들이 활주로까지 내려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어떻게든 문이 열린 항공기에 올라타기 위해 탑승 계단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절박한 모습도 포착됐다. 도로 곳곳은 카불 시내를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로 꽉 막혔다.

또 다른 동영상에는 기관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SNS에는 “미군이 카불 공항에서 질서 유지를 하려고 발포하는 바람에 민간인이 죽었다”는 글이 게재됐다. 로이터통신은 미 관계자를 인용해 “미군 병사들이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군용 비행기에 강제로 탑승하려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공중에서 발포했다”고 전했다.

카불 공항에서 이륙한 항공기 바퀴 부근에 매달렸던 시민들이 추락해 숨지는 참극도 벌어졌다. 인디아TV 등은 “항공기 바퀴에서 두 명이 추락하는 모습이 포착됐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아프간의 상황을 ‘스테로이드를 맞은 사이공’(Saigon on Steroids)이라고 묘사했다. 카불 상황이 사이공 탈출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의미다.

아프간 주민들이 이처럼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과거 탈레반 집권 당시 극단적인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음악, TV 등이 금지됐고 도둑의 손을 자르거나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돌로 쳐 죽게 하는 가혹한 벌도 허용됐다. 여성들은 교육과 직업이 금지됐고, 성폭력과 강제 결혼이 횡행했다.

우리 공관원들도 우방국의 도움으로 긴급히 중동지역의 제3국으로 철수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전날 주아프간 대사관을 폐쇄하고 공관원들을 철수시킨 배경에 대해 “정의용 외교부 장관 주재로 화상회의를 하던 도중 우방국으로부터 ‘빨리 카불공항으로 이동하라’는 메시지가 최태호 주아프간 대사에게 왔다”고 밝혔다. 카불이 곧 탈레반에게 함락될 것이니 당장 철수해야 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철수 작전’에 돌입한 공관원들은 기밀문서 등을 파기한 뒤 미군 헬기를 이용해 카불 공항 내 미군 통제 활주로로 이동했고, 아프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교민 A씨도 카불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임송수 손재호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