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라는 곳이 있다. 서울시가 유망한 디자이너를 선발하고 입주시켜 시장 진입을 돕는 곳이다. 지금은 여러 기관에서 운영하는 창업지원센터가 흔하지만 벌써 17기가 입주해 있는 서울패션창작스튜디오는 명칭조차 낯설게 들리던 시절에 시작된 그야말로 선도적인 디자이너 지원 제도였다.
미국과 유럽에는 디자이너 산업이 워낙 발달해 디자이너들과 수많은 편집숍을 연결하는 중개 산업도 함께 발전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자신의 감각만 잘 어필하면 중개인들이 앞장서 성장을 도와준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중개인이 거의 없다. 유명 브랜드를 선호했던 문화로 인해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 개인이 혼자 감당할 일이 너무 많아 자력으로는 시장에 진입해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간파한 서울시가 신인 디자이너 양성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서울시는 지원 초기에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에게 사업 공간을 열어주면서 기획과 생산, 홍보를 모두 돕고 심지어 유통 채널까지도 구해줬다. 당시 대형 백화점은 작은 브랜드를 취급해주지 않았고 온라인 편집숍도 발달하기 전이라 신진 디자이너들이 옷을 팔 곳이 없었다. 그럴 때 동대문 두타몰의 넓은 공간을 임대해 입주 디자이너들이 소비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 이곳의 초기 디자이너 명단에는 지금 누구나 알만큼 성장한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물으면 창작스튜디오가 아니었더라면 브랜드를 시작도 못했고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알고 보니 거기에는 입주 디자이너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던 담당자들이 있었다. 본인이 못다 이룬 꿈을 후배들이 이루기 바라는 마음으로 같이 밤을 새웠다고 한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담당자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달라진다. 더 많은 분야에 이런 곳이 생기면 좋겠다. 공간만 열어주고 가끔 성과만 묻는 곳 말고, 자기 일처럼 열정적인 운영진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 말이다.
윤소정 패션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