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세인트 보이의 마음은 어떤 곳일까

입력 2021-08-13 04:07

도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나처럼 단 한 경기도 보지 않은 사람조차 후유증이랄까 뒤숭숭한 여운 속에 지내고 있는데 각종 경기를 챙겨보고 응원했던 사람들은 다들 괜찮을지 모르겠다. 물론 선수들만큼이야 아니겠지만 국민들도 상당한 기력을 소진했을 것이다. 응원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멈춘 채 주먹을 꼭 쥐고, 소리도 지르고, 웃고 눈물도 짓기도 하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실제로 집에 있다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외치는 함성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경기도 보지 않았는데 후유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기사들을 챙겨보면서 조금 층위가 다른 생각을 바쁘게 했다. 육체들의 경합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들의 경합에 대해. 그리고 육체와 마음 사이의 엄격한 경계에 대해서.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낀 건 근대5종 경기에 대한 기사에서였다. 펜싱, 수영, 승마, 사격, 육상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고강도의 종목. 승마의 경우 말은 랜덤으로 배정받는다는 규칙 아래 독일의 아니카 슐로이 선수는 ‘세인트 보이’라는 말과 처음 만나 경기에 임했다. 세인트 보이는 자꾸만 장애물 넘기를 거부했다. 결국 슐로이는 0점을 받았다. 그는 울면서 경기를 치렀다. 코치인 킴 라이스너는 세인트 보이에게 주먹질을 했다.

슐로이의 마음은 어떤 곳일까. 끝없이 무너져도 되는 곳. 거기선 절망에 한계는 없다. 라이스너의 마음은 어떤 곳일까. 화가 나면 주먹질 정도가 아니라 몇 번이고 상대를 죽이고 또 죽여도 되는 곳. 거기엔 법이 없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의 자유가 보장된 마음의 일을 규칙과 상식이 존재하는 몸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선수가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섭고 더러운 아수라장을 꾸역꾸역 견디고 감당하며 그것이 몸의 영역과 얽히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슐로이와 라이스너는 거기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요조 가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