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 최초 신학교’ 감신대가 열어가는 뉴노멀 시대의 비전

입력 2021-08-13 03:05
한국 최고(最古) 신학대인 감리교신학대는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해 있다. 사진은 녹음에 둘러싸인 감신대 대학원 건물이다. 감신대 제공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교회 개척과 함께 학교와 병원 설립으로 이 땅에 복음화와 근대화를 함께 이루고자 했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성껏 돌보며 가르쳤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현지인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배재학당에 전도인 양성반을 만들어 1887년 한국 최초의 신학 교육을 실시했다. 이어 존스 선교사는 1893년 별도의 ‘신학반’을 조직했고, 1899년에는 ‘신학회’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진행해 남북감리교회 연합의 토대를 놓았다.

1915년 감신대 캠퍼스 모습. 감신대 제공

1901년 5월에는 신학교육을 마친 신학생 가운데 김창식, 김기범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회가 여타 교단보다 이른 시기에 신학교육을 실시하고 첫 목사를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지인 목회자 양성의 중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목회자 양성에 대한 열정은 복음주의 신학교육 기관으로서 감리교신학대의 탄생 토대가 됐다.

일찍이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통해 이 땅에 통전적 선교를 감당했던 감신대는 시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민족 지도자를 배출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던 감신대의 목회자 7명은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민족 지도자를 배출하면서 동시에 민족 대학의 사명도 감당했다. 감신대는 자유 진리 평화 평등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열망했다.

또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세운 민족지도자도 이곳에서 나왔다. 신민회 조직의 토대를 만들었던 민족운동의 거인 전덕기 목사,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해 의정원 의장직을 역임한 손정도 목사, 좌우 이념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헌신했던 현순 목사, 농촌계몽운동의 주인공이며 소설 상록수의 실재 인물인 최용신 전도사 등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 됐던 ‘감신의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감신대는 1931년 신학 교육 기관으로는 한국 최초로 4년제 남녀공학제를 실시했다. 1955년에 중부연회에서는 최초의 여성 목사를 배출했다. 감신대 출신으로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유학한 전밀라는 명화용과 함께 최초로 여성 목사안수를 받아 전국 교회의 여선교회 사업을 활성화시키며 목회자의 귀감이 됐다.

감신대는 한국 최초의 전문 신학지 ‘신학월보’를 1900년 12월에 창간해 1910년까지 발간했다. 이를 이어받아 1916년에는 ‘신학세계’를 발행했다. 당시 교파를 초월해 대부분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신학세계에 실린 ‘성경연구’ ‘조직신학’ ‘실용신학’ ‘종교교육’ ‘역사와 전통’ ‘절제’ 등의 코너를 공부했고, 이런 일들을 통해 한국 신학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감신대 채플 건물. 감신대 제공

현재 감신대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뜻을 좇으면서 경건과 실천을 교육 지표로 삼고 있다. 세계 감리회의 최대 신학교인 감신대는 미국 에모리대 캔들러신학교, 클레어몬트신학교, 웨슬리신학교 등 세계 명문 신학대학교 10곳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이들 학교와 교환 학생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면서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서울 중심지에 터를 잡은 감신대는 신학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신학과 복음의 정수를 정성껏 가르치는 명문 신학교다. 20세기 초 역동의 현장에서 신학과 지성으로 민족 복음화와 근대화에 헌신했던 감신대는 21세기 초 뉴노멀 시대를 가로지르는 미래 목회자와 인재 양성을 위해 기도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소요한 감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