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뷰티의 그림자… 기능성 화장품의 ‘불편한 민낯’

입력 2021-08-14 04:02 수정 2021-08-14 04:02
게티이미지뱅크

올해 초 화장품 업계는 ‘선크림 검증’으로 진땀을 뺐다. 자외선차단지수(SPF)가 높고 사용감도 좋아 인기였던 많은 국내 선크림들이 겉면에 표기된 SPF 50에 미치지 못한다고 알려지면서 소비자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화장품 업체들의 공개 사과와 환불조치,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행정처분까지 이어진 선크림 사태. 한 차례 홍역을 치렀지만, 화장품 업계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불신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선크림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성 화장품에서 같은 문제가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여전히 남아 있다.

믿고 썼던 ‘K-뷰티’ 선크림… SPF50 거짓이었다

일명 ‘선크림 SPF 조작 논란’은 지난해 말 해외에서 먼저 불거졌다. 국내보다 미국,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서 유명한 A사 선크림의 해외 임상시험 결과 SPF 수치가 20 미만이라는 내용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된 것이다.


지난해 12월 한국피부과학연구원 안인숙 원장이 국내 선크림 14종을 대상으로 진행한 SPF 임상시험 결과는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안 원장의 유튜브에 따르면 임상시험한 제품 대부분의 SPF 수치가 표기된 50보다 낮게 나왔고, 일부는 30조차 되지 않았다. 파장은 컸다. 놀란 브랜드사들은 줄줄이 자사 제품에 대해 SPF 검증을 진행했고, 최소 10여개 제품이 갑자기 단종되거나 전면 환불조치됐다. 일부 업체는 ‘수치 미달’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내걸었다. 식약처는 지난 6월 A사 선크림을 시작으로 SPF 허위 광고가 확인된 일부 제품에 대해 2개월 판매금지 행정처분을 내렸다. 제조사를 대상으로 한 식약처 조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용감’ 바꾸며 SPF 수치 뚝… 제도의 빈틈

국내에서 자외선 차단제 같은 기능성 화장품을 판매하려면 임상시험을 포함한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기능성 화장품이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생산된다. 제조사가 제품 개발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도맡고, 브랜드사는 유통과 마케팅만 담당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화장품 제조사가 기능성 제품마다 식약처의 심사를 받을 거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기능성 화장품 심사 규정을 보면 ‘이미 심사받은 제품과 기능성 원료의 종류, 규격, 함량 등이 동일한 경우’ 심사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행정 절차를 간소화해 둔 것이다.


예를 들어 제조사가 B선크림을 만들어 식약처의 심사를 통과하면, 이 제품의 사용감을 조금 바꿔 여러 브랜드에 납품할 수 있다. B선크림에서 파생된 C, D, E선크림이 시장에 나오는 셈이다. 이때 식약처 심사를 받은 B선크림을 ‘모처방’ 제품이라 부른다.

문제는 같은 기능성 원료가 동일한 양으로 들어갔어도 첨가제, 제조법, 원료의 품질 등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제형이 바뀌어도 기능성 원료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식약처는 자외선 차단제의 경우 ‘크림’ 제형의 모처방 제품을 ‘로션’ 제형으로 바꾸는 것을 허가하고 있지 않지만, 구체적인 점도 기준은 없다. 결국 제조 과정에서 제품별로 정확한 SPF 임상시험이 필요한데, 이 단계에서 제대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아 ‘자격미달’ 선크림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

안인숙 원장은 13일 “일부 제조사는 기존 성분 자료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추정치를 내 임상기관에 의뢰했고, 임상기관은 제조사가 요청한 SPF 수치에 맞게 실험을 디자인했다”며 “(SPF 검증) 영상을 공개한 뒤 잘못된 관행 개선을 위한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 현재 출시되는 선크림들은 철저한 검증을 거친 제품들”이라고 전했다.

안 원장은 “선크림 사태는 총체적 문제”라며 “법적 책임을 지는 책임판매업자가 브랜드인 만큼 추가 임상시험이 어렵다면 원료 함량이나 임상 결과 자료를 정확히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품질관리에 소홀했던 브랜드사, 제도의 맹점을 이용한 제조사, 관행적으로 업무를 처리한 임상기관, 모처방 변형 제품에 대한 검증이 부족한 시스템까지 모두에게 원인이 있다는 설명이다.

제조사에만 기대는 브랜드… 점검 필요

선크림 사태는 ODM이 발달한 국내 화장품 산업의 문제점도 드러냈다. 제조사에 제품 개발·생산을 모두 맡기는 ODM을 이용하면 전문지식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화장품을 만들 수 있다. 그만큼 제조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이번 논란의 중심에 선 선크림들은 대부분 중소 규모 브랜드의 ODM 제품이었다. 브랜드사가 SPF 문제를 인지한 뒤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선크림 리콜을 진행했던 F사는 “제조사 측에 모처방 함량이 표기된 전 성분 자료를 요청했지만 기술 보호를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형 ODM 기업으로 수요가 쏠리다 보니 중소 브랜드는 샘플을 받기도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제조사를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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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주름 개선, 미백, 탈모 완화, 여드름 개선 제품도 모두 기능성 화장품에 해당한다. 지난 4월 선크림 사태 관련 제조사의 불법행위를 폭로했던 유튜버 디렉터파이는 기능성 화장품에 대한 식약처의 관리감독이 더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90만 팔로어를 가진 그는 “제조사가 내부 기밀을 이유로 함량 정보나 식약처 심사 서류 제공을 거부한다면 브랜드는 대처하기 어렵다”며 “탈모 샴푸 등에서도 선크림 같은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 ‘기능성’이라는 단어를 붙일 땐 제조사가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는 결과만 브랜드에 통보하는 방식이 아니라, 브랜드가 모처방 파생 제품에 대한 검증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능성 화장품에 대한 검증이 단발성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병조 을지대 미용화장품과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화장품법을 독립해 산업 기반을 만든 나라”라며 “기능성 화장품은 그 성분의 기능이 1년 뒤에도 유지되는지, 정말 효과가 있는지 중간중간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