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의 대부흥기를 이끌었던 선교사 무디가 영국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면서 오랫동안 흠모하고 존경하던 스펄전 목사를 만나러 집을 찾아갔다. 당대 최고의 미국 부흥사와 당대 최고의 영국인 설교가의 만남이 이뤄지던 순간이다. 무디가 두근거리며 문을 두드리자 스펄전 목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무디 앞에 예상치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스펄전 목사의 입에 큼지막한 파이프 담배가 물려 있었다. 깜짝 놀란 무디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기독교인이 담배를 피울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자 스펄전 목사가 산달이 다 된 듯한 무디의 배를 쿡 찌르며 장난스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기독교인이 이렇게 배가 나와도 되나.”
이 재미난 일화는 지역과 문화에 따라 정죄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다. 실제로 미국 보수 교단에선 술 담배를 악한 죄로 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교회에선 술 담배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다. 술 담배는 신앙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건강 문제라는 게 유럽 교인의 시각이다. 유럽 교인들의 눈에 문제가 되는 건 다른 데 있다.
미국 기독교 역사와 비교할 바 없이 오래된 유럽교회에선 수도원 제도가 생긴 6세기부터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일곱 가지 대죄(cardinal sin)를 가르쳐 왔는데 그중 하나가 탐식과 게으름이다. 그래서 유럽 전통에 익숙한 교인의 눈엔 술 담배 대신 무디의 튀어나온 배가 오히려 죄악의 삶을 살아온 표징으로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미국에 왜 그렇게 비만한 기독교인이 많고, 유럽의 유명한 신학자와 목사들 중에 애연가와 애주가가 그리도 많은지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죄를 멀리하고 선을 추구해야 하는 삶이다. 하지만 죄가 무엇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이 무엇이냐는 문제의 각론에 들어가면 매우 다양한 해석과 설명을 만나게 된다. 이 다양한 답변들은 대부분 시대와 문화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 시대와 문화, 지역에 구애 받지 않는 기독교의 공통분모,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신앙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교회 안엔 참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하나의 세례, 한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곡진하게 하나로 품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그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통분모에 속한다. 도저히 포용할 수 없는 죄인을 품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났고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이 사랑과 포용의 복음이 우리 안에 거칠게 부딪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뛰어넘게 만든다. 유한하고 임시적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지 않고 상황에 따라 매번 답이 달라진다면 그건 하나님과 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임시적인 것으로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배가 나와도 술 담배를 해도 사랑이면 넉넉히 안아 줄 수 있다. 다른 데라면 몰라도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교회라면 이런 종류의 사랑을 전하고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이건 빼놓은 건강 이야기인데 막 먹고 마시다 보면 하나님을 너무 빨리 만날 수 있으니 무엇이든 적당히 하길 바란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되지만 맹독도 제대로 쓰이면 약이 된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